화폐는 상품권이다.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은 그렇게 말한다. 미국이 중국에서 물건을 수입하고 낸 달러는, 결국 중국이 달러로 살 미국 물건이 없다면 아무 쓸모 없다. 중국이 직접 미국 물건을 살 때가 아니라, 다른 나라(예컨대 캐나다)에 진 빚을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로 갚는다면? 마찬가지다. 캐나다 역시 그렇게 받은 달러로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미국에서 물건을 사는 것 뿐이다. 그래서 수입은 결국 자기 나라 물건을 강매하는 행위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공기업에 다니다보니 가끔 온누리상품권이 급여를 일부 대체하는 차원에서(인지 아니면 노조 기금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온다. 주차가 쉽고 쇼핑하기도 편한 대형마트에 길들여진 현대인이 전통시장을 강제로 사용하게 만들자는 취지는 이해한다. 그러나 아이들도 어리고 시간도 없는 우리 집은 그래도 보통 할인마트를 가고, 넘쳐나는 온누리상품권은 부모님들께 드릴 때가 많다. 공짜로 드린다고 비난받을 일은 없을 텐데, 혹시 다른 사람에게 (가격을 약간 할인해서) 팔면 이는 비난받을만한 일일까? 온누리상품권을 사가는 사람은 결국 이를 가지고 전통시장에서 물건을 사야 할 것이다. 만약 이 사람이 차액을 남기고 다른 사람에게 다시 상품권을 판다 해도, 결국 마지막에 상품권을 손에 쥔 사람이 이 상품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전통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것 뿐이다. 결국 온누리상품권을 10만원어치 받은 사람이 이를 전통시장에서 다 쓰면 10만원만큼 이익을 누린 셈이고, 다른 사람에게 9만원을 받고 팔았다면 9만원만큼 이익을 누리고 1만원은 다른 사람에게 주었을 뿐이다. 어찌됐든 전통시장 매출은 10만원 증가 확정이다.

쌍방 이익이 줄어드는 경우는 상품권을 다 못썼을 때뿐인데, 예컨대 10만원어치 상품권을 받고 쓰다쓰다 7만원밖에 못 쓰고 3만원어치가 남았다면 상품권 받은 사람도 7만원만큼만 이익을 얻고, 전통시장 매출도 10만원이 아니라 7만원만 올라가는 셈이다. 게다가 소득세는 사용한 7만원만큼이 아니라 처음 받은 상품권 가치 10만원에 대해서 부과될 것이므로 상품권 받은 사람이 얻은 이익은 사실 7만원만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쌍방이 잃은 이익 3만원+a, 매출 3만원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전통시장에서 물건을 살 일이 있는 사람에게 파는 편이 최선이다. 비록 처음에 상품권을 받은 사람이 누릴 이익은 10만원까지는 안되겠지만 7만원(-a)보다는 많아질 것이고, 전통시장 상인은 10만원 매출상승 효과를 모두 누릴 것이며, 상품권을 사서 쓴 사람은 싸게 상품권을 산 만큼 이익을 보게 될 것이다.

온누리상품권 할인(속칭 '깡')을 금지한다는 정책이 발표되었을 때는, 그래서 정부의 논리가 궁금해졌다. 상품권 거래 금지 뒤에서 전통시장을 가기가 상대적으로 편한 사람(그리고 상품권을 싸게 사서 이익을 얻을 사람)이 아니라, 상품권을 직접 받은 사람이 억지로 전통시장에 가야 한다는 논리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소비자의 총효익도 줄어들 것이고, 전통시장 매출 증가액도 아마 최대액(상품권 발행액 또는 상품권 거래 허용시 거래 기대액)보다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전통시장을 살리라고 준 상품권을 감히 현금으로 바꾸다니!'라고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온누리상품권은 달러 같은 일반 화폐보다도 더욱더 완벽한 상품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상품권을 사가는 사람은 결국 직접 쓰거나, 직접 쓸 사람에게 팔아야 한다. 그리고 상품권을 사용할 확률은 이를 '깡'하려는 사람보다 사려는 사람에게 높을 것이다. 결국 상품권 거래 허용은 (나는 도저히 정당하다고 판단하기 힘든 도덕적 기준을 제외하면) 전통시장 상인을 포함하여 모두에게 이익이다.

성남에서 시작한 청년배당 바우처가 시장에서 거래되어 논란이 된다고 한다. 청년들에게 소득을 주는 동시에 성남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바우처라 성남 내 경기도 활성화한다는 취지라는데, 거래 행위가 논란 대상이 되는지를 묻는다면 내 의견은 온누리상품권 경우와 같다. 바우처를 할인해서 판다면 손해를 보는 사람은 그 청년 뿐이다. 이를 손해보고 판 청년을 비난할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오히려 그 청년에게 쓸모없는 성남 물건을 사야만 하는 바우처 형태로 청년배당을 지급했다는 사실을 비난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성남시가 (배당을 받지 못할 나머지) 성남 주민에게서 최소한의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 낼 수단이라는 데서는 이해할 만 하다. 이 정도가 청년배당 바우처 거래에 대한 의견이다.

그보다 더 큰 논쟁 대상은 과연 '청년배당은 정당한가?'일 것이다. 내 의견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청년배당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전국민 배당'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논거는 내가 지금 번역하고 있는 책에서 잘 다루고 있다. 신생 출판사 '갈마바람'에서 의뢰한 <With Liberty and Dividends>는 예전부터 내가 지니고 있었지만 깊이 고려해보지도 근거를 댈 생각도 못 하고 있던 주장에 정확하게 부합하면서 실제 사례와 기본적 정책 방향, 사상 근거를 조목조목 댄 책이다. 내가 번역 깽판만 치지 않는다면 (제발 그렇지 않기를 빈다) 상반기에 출간 예정이라 한다. 만에 하나 번역자에 내 이름이 실리지 않는다 해도 큰 반향을 일으켰으면 하는 책이다. (그렇다고 진짜 이름을 빼지는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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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Rules>에 착수하여 한참 1차 작업중에 접어든 지 3주 (<포브스> 작업이 있었으니 사실상 2주),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이코노미스트> 번역 건'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상세조건은 들을 필요도 없었지만 일단 작업량과 기한을 말씀해 주시니 생각하는 척을 1초간 하고 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코노미스트>를 번역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이코노미스트에서 발행하는 <World in 2016>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마지막으로 산 <World in ~>은 아마 2008년판이었던 듯하다. (책이 본가에 있어 정확하지는 않다) 민주당 경선에서 오바마가 선전하겠지만 결국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후보에 당선될 거라고 예측하던 부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뭐 이거야 인상깊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 기억에 남지만, 그래도 한 해 일을 경제 뿐 아니라 정치, 과학, 문화 등 다각도에서 예측이라도 해 보는 책 중 대표를 달리 꼽기도 힘들 것이다.

나 같은 초보가 일을 골라가며 할 수는 없다. 무슨 책이든 무슨 글이든 맡겨주기만 하면 할테니 '무슨 분야를 번역하고 싶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조금 더 유의미한 질문을 하자면, '이미 번역 건이 진행중이거나 본업이 바빠서, 일을 더 맡는다면 밤을 새야 한다 해도 꼭 해보고 싶은 번역 일은 무엇이냐'고 물어야 한다. 답은 두 가지, <문명>과 <이코노미스트> 관련 번역이다. 

(2 시절부터 해 왔고 5 플레이타임이 1,000시간이 넘었으며 신작이 나오면 당연히 할 게임 문명에는 '백과사전'이 있다. 등장인물 대사 번역 개념이 아니라 토막지식 번역이다보니 게임번역이라기보다는 역사책 번역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내게 오퍼가 올 일은 없겠지만)

발주일로부터 납품일까지 3일밖에 되지 않는 촉박한 일정이 주어졌지만 분량 역시 기사 두 꼭지라 발주 당일 밤에 1차 작업을 완료했다. 다른 나라 정치 얘기라 몇 가지 찾아가며 번역해야 했지만 이 또한 번역의 매력이다. 

이리저리하여 납품을 끝내고 출간을 확인한 후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늦게서야 손에 넣은 책 표지만 보면 마치 이코노미스트가 한국어판도 낸 듯, 아니면 현대경제연구원이 번역을 한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바른번역 이름은 맨 뒤 서지에만 나와 있다. 이 외 나를 포함한 개별 번역가 이름은 없다. 

내가 일부만 참여한 책이라 자세하게 평을 하기는 껄끄럽다. 다만, 내가 책을 고를 때라면 번역가 이름이 앞에 걸려 있지 않거나, 개인이 아닌 단체가 번역자로 올라간 책은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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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입문

독서 2015. 12. 8. 01:03

5월 23일에 읽기 시작한 이 책을 오늘 드디어 다 읽었다. 여기서 읽었다 함은 말 그대로 지문을 소리내서 읽었다는 얘기다.

이 책의 부제는 'Latin without tears'다. 라틴어 원문과 단어설명, 한국어 대역이 91개 장에 걸쳐 제시되어 있고, 라틴어의 장벽인 문법 설명은 비교적 간략하게만 나온다. 지문을 읽다 보면 마치 라틴어를 이해하게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해준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단점이라면 군데군데 보이는 오탈자다. 8월에 만원 더 비싼 가격으로 나온 개정판에서는 고쳤겠거니 한다.

생각해보면 라틴어로 말하고 듣고 쓸 일은 절대 없을테고 저엉말 잘 해 봤자 읽기나 할텐데, 내가 고고학자도 아니고 번역판이 최소한 영어로라도 나와 있는 고전을 읽는다 치면 오독한다고 해서 나 말고 딱히 피해 볼 사람은 없다. 그러니 괜히 격 변화를 외워가며 골치를 썩이느니 대충 맛만 보는 정도로 만족하려 한다.

물론 맛만 본다는 목표에는 문제가 조금 있었다. 첫째, 뜻도 모르고 노래를 부르고 있자니 맛만 보는 데 5월 후반부터 12월 초까지 반년이 넘게 걸렸다. 맘먹고 소리내 읽기만 했으면 한 25시간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하는데, 내가 또 그럴 수 있을 만큼 한가하진 않다. (그러나 라틴어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은 가끔 한가하다) 둘째, 맛만 볼거면 대체 왜 쓸데도 없는 라틴어를 쓸데도 없는 만큼만 배우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냥 산이 있어서 오른 것일 뿐이다.

2.5만원짜리 책 사서 반년동안 가지고 놀았으면 일단 돈을 버린 것은 아니라 치고, 당분간 책장에서 묵혀두다 생각날 때 다시 읽어볼까 한다. 여태까지는 자비로운 저자님들 덕분에 마주친 적 없는 스페인어(등 로망스어) 인용문을 앞으로도 마주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에 스페인어 역시 언젠가 배워보고 싶은 언어인데, 그 때 라틴어 '경험'('학습'이라고는 양심상 하지 못하겠다)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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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된 <공유경제는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가> 소개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코노미인사이트는 한겨레 계열 경제전문 월간지다. 이 잡지의 '경제와 책' 코너에서는 번역가가 자신이 번역한 책 내용을 소개한다. 내게 직접 연락이 온 것은 아니고, 바른번역으로 정남기 편집장이 연락을 해 와서 이지은 팀장님이 내게 전화를 주신 것이다. 경제전문지에서 연락이 왔다고 해서 처음에는 땅에 떨어진 공인회계사의 지위와 자괴감(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에 대하여 취재를 하나 했다.

원고지 13페이지 분량이고, 매당 원고료는 번역 일보다 높다. 하지만 예상했다시피 아무리 읽었던 책 요약이라 해도 내 글을 쓰는 편이 번역보다 힘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요청사항에는 '서평이나 칼럼이 아니니 수락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했지만, 내 이름으로 나가는 글에 욕심이 아예 안 날 수는 없다. 번역은 일이 생기면 바로 돌입하는데, 이 일은 구상 명목으로 맡은 지 이틀 만에야 시작해서 (게다가 하루는 밤잠도 설쳤다) 하루 동안 초안을 완성했다.

그리고 힘을 잔뜩 준 초안을 아내에게 주고 출근했다 퇴근한 후 엄청난 혹평을 들었다. 너무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비유도 명확하게 와 닿지 않는 데다 과연 필요한지도 의심스럽다는 얘기도 들었다. 번역 초안을 보여주면 처음에는 "이렇게 번역해도 먹고 살 수 있구나"라고 하던 아내가 시간이 지나면서 "번역한 티가 덜 나고 매끄럽네"라고 할 때는 '너무 기 죽이는 것 같아 이제 의견을 안 내기로 했나보다'고 지레짐작했는데, 이런 혹평을 듣고 나니 '아, 여태까지는 진짜 글이 좋아져서 좋다고 한거구나'라고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어쨌든 아내 얘기를 참고하여 비유를 쳐 내고 뜻을 명확히 하려 노력했다. 두 번째 안을 보여주고는 '훨씬 낫다, 최소한 이해는 된다'는 발전인지 뭔지 약간 미심쩍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언론 글쓰기에는 달인일 수 밖에 없는 매일경제 용환진 기자에게 '한번 봐 달라'고 보냈다. 가볍게 읽고 10-20분이면 답장을 주겠거니 했는데 답은 4시간 후에 왔다. 꼼꼼한 첨삭 결과물과 함께. 기사에 thanks to 부분이 있으면 이름을 넣어주겠다는 얘기를 했으나 그런 부분이 없을 거라는 사실은 나도 알고 용환진도 알고 용환진이 안다는 사실도 내가 알고 내가 안다는 사실도 용환진이 아는 사실이다. 나 말고 아무도 안 볼 이 글에다 대신 감사를 표한다. 게다가 용환진 기자는 첨삭의 대가로 내가 밥을 사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밥과 커피를 또 사주는 대인의 풍모를 보였음을 다시 한 번 명시하는 바다.

실제 출간본을 아내와 용환진 기자의 의견을 반영한 안과 비교해 보니 큰 차이가 없다. 몇 군데를 삭제하고 한두 군데 고친 정도다. 다만 한 가지 일만 더 기재한다. 금요일 마감이라 목요일 25시에 발송했는데, 주말까지도 아무 답이 없는거다. 글을 보고 '아, 이건 도저히 안 되겠군'이라고 판단하고 대체 필자를 구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월요일 9시에 바른번역에서 연락이 왔다. "혹시 보내셨나요? 못 받았다고 연락이 왔는데요." 보낸 메일을 그대로 전달했는데 또 아무 연락이 없다. 출간본에 실린 글을 확인할 때까지는 과연 이 글이 실릴까 하는 우려를 했다는 사실을 밝혀 놓는 바다. 게다가 잡지사 홈페이지에는 아직도 11월호 내용만 올라와 있다. 나를 포함하여 보잘 것 없는 (그래서 글이 실릴 거라 확신하지 못하는) 번역가의 심기를 경호해 달라고 이코노미인사이트에게 약하게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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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품한 지 1년을 15일 남겨놓고 출간되었다.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최초로 맡은 책이다. 즉 '공역'->'단독번역'->'샘플 통과에 따른 단독번역'으로 이어지는 출판번역 테크 중 첫 번째인 것이다. 샘플로 따낸 것도, 단독 번역이 아닌데도 기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납품하고 1년이 다 되어 갈 때까지 (번역료는 받았지만) 출판이 되지 않아 '번역 퀄리티를 보고 출간 포기설'이 거의 굳어져 가던 어느 날 갑자기 출간이 되어 버린 요즘, 두 가지 의문점이 나타났다.

1. 제목은 왜 저렇게 지었을까? 이 책 원제는 <The Quest for Security>다. '보호를 찾아서' '안전을 찾는 여행' 아니면 친구 말대로 와우 공략집 같은 원제를 살려 '안보 퀘스트'라고 하기에는 어색하겠다. 하지만 원제와 아무 연관 없는 영문 음역을 제목으로 내세운 데는 당혹감이 든다. 내 가설은, 비용은 다 들였으니 출간은 해야겠는데 (역시나) 번역 퀄리티를 보고 스티글리츠가 "원서가 내 책이라는 흔적을 남기면 문제삼겠다"는, <위대한 탈출> 사태의 정반대 쯤 되는 클레임을 걸어 억지로 바꿨다는 것이다.

2. 표지 중앙에 떡하니 박힌 노란 피라미드와 눈은 뭘까? 역시 원서 표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책의 제목은 'Quest for Security' 또는 '더 초이스'지 '프리메이슨'이 아니다.


이런저런 내용을 차치하면, 딱딱하고 좋은 책이다. 이 책을 번역하지 않았다면 내가 언제 무슨 계기로 기후 변화나 글로벌 거버넌스, 도시화의 의의와 영향에 대하여 생각해 봤겠는가? 시장경제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면 우선 외부성을 시장 안으로 포괄해야 한다. 친환경 공법, 친환경 소재를 사용한 제품이 비싼 것은 싼 제품이 유발하는 공해의 비용이 시장에서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개인이나 기업 수준 뿐 아니라 일개 국가 수준에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시장경제 요소를 지닌 경제는 경쟁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결국 전 세계 국가가 의견을 조율하는 글로벌 거버넌스 형태가 중요한데, 모든 나라가 동일한 발언권을 얻기는 힘들고, 또한 G7/G20을 위시한 소수 강국이 주도하는 체제로는 이 외 국가의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오래 전부터 굉장히 익숙할 이런 주제를 나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깊이 접하게 되었다. 공부하면서 돈도 받는 번역 일을 내가 실질적으로 시작하게 된 뜻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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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戰

독서 2015. 11. 23. 23:38

'고전을 읽어야 한다' 좋다.

'고전은 머리가 깨질 정도로 어렵지만 그래도 읽어야 한다. 부자가 될 수단으로써' 여기는 미지일 뿐 아니라 동의하기도 힘든 부분이다. 오히려 첫 번째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내가 뭔가 잘못 알고 동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하는.

'고전은 머리가 깨질 정도로 어렵지만 그래도 읽어야 한다' 두 번째 문장의 가지를 쳐낸 이 문장에는 사실 제일 동의하기 힘들다.


몇 년 전부터 고전 읽기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유명세를 얻어 간 저술가가 있다. 그 외 이와 독립된 어떤 저작 또는 주장으로 유명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는 번역을 하면서 새삼 내 독서 경력이 일천함을 깨닫고 이를 한 방에 해결할 손쉽고도 간편하며 수고가 들지 않는 방법을 찾다, 고전을 읽으면 파생형인 비고전은 안 읽어도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한 마디로 독서량을 훨씬 줄여줄 수 있는 해결책이 고전 읽기가 아닌가 하는 가설에 이르렀다.

물론 중간 검증 결과는 참혹했다. 내가 평생 읽을 수 있는 (정확히 말하자면 곱씹고 갈무리하는 과정을 다 제외하고 그냥 훑어 읽는) 양이 10 정도라고 치고 전 세계 모든 책이 한 1조 정도라고 치면, 고전도 한 100 정도는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고전 중 1/10을 읽을 수 있다는 얘기도 아니다. 그냥 내 능력을 벗어나는 양이라는 얘기이므로 저 가능해 보이는 수치가 눈에 거슬린다면 로그 스케일로 환산하여 생각해도 좋다)

하여간, 고전을 읽으려면 우선 무엇이 고전인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유명한 고전 목록으로는 시카고 대학 선정 고전선을 빼놓을 수 없겠지만 부업상(직업상이 아니다. 아직은) 원문 의미 못지 않게 한국어 표현이 중요한 내겐 한국에서 책을 낸 출판사까지 표시된 목록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저술가가 쓴 책의 부록에서 도움을 크게 받았다. 목록 자체에 대한 개인적 감상도 물론 있으나 읽지 않은 책이 많아 그건 이후에 쓴다.

하지만 그 책의 본문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매우 명확하기 때문에, 그리고 저자도 딱히 내 동의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쓸 필요도 없다. 오히려 내가 동의하기 힘든 부분은 '고전은 머리가 깨질 정도로, 읽다 비명을 지를 정도로 어렵다. 수없이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난해하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읽으면 머리가 좋아진다'정도로 요약 가능한 내용이다.

나는 내가 읽어 온 책을 모두 100% 이해했을까? 100%라 함은 줄거리인가, 저자가 염두에 두고 쓴 모든 함의인가, 아니면 저자마저 의식하지 못했지만 독자는 매우 명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상징까지인가? 내 생각에 어떤 책을 읽기 전과 읽고 난 후 약간이라도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 책은 읽힌 것이다. 모든 단어와 문장의 함의까지 (그러려면 당연히 그 책에 영향을 끼친 전 세대의 책의 내용과 함의까지, 다시 그 전 세대로...) 읽어내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군주론>은 고전인가? 그렇지 않다고 감히 주장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읽어내야 군주론을 '읽은' 것인가? 모든 주석을 꼼꼼히 읽고 해설서까지 여러 권에다, 군주론에 영향을 주었거나 군주론에서 영향을 받은 책의 계보와 내용까지 꿰어야 군주론을 감히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좋다. 한 번 스치듯 읽은 사람과 이처럼 책이 닳을 때까지 읽은 사람의 이해 수준은 크게 차이가 날 법 하다. 그리고 일천한 내 경험에 따르면 군주론은 그냥 가볍게 넘겨가며 읽어도 정치라는 주제와 비유라는 기교 면에서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다.

저자가 드는 사례 대부분이 내게는 불편했다. 손자병법을 이해했다고 하려면 <전쟁론>을, <군사학 논고>를, 그 외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병서를 모두 읽고 이해해야 할까? <국가론>을,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었다고 하려면 정말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까지 읽어야 할까?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좋다. 그러나 위 책들의 저자가 의도한 내용을 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게다가 전부 다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나는 손자병법과 국가론과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누군가가 '책에 무슨 내용이 나오던가요' 묻는다면 '직접 읽어보세요'라고밖에 말 못한다. 하지만 생각 외로 딱딱하지 않은 책이라는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고전은 (번역이 제대로 되어 있다면) 다양한 독자가 자기 수준만큼 얻어갈 수 있는 책이고, 또 자기가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기며 읽어가면 되는 책이다. 읽기도 전에 '엄청나게 어렵지만 반드시 읽어야 한다!'라고 겁부터 먹으면서 읽을 필요가 없단 얘기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윽박지르는 그 저술가의 의도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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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1. 수주 경위

10.13 09:00 <Simple Rules> 샘플 제출 마감기한이었으며, 당연히 그 전날 밤에 전송 완료했다.

10.13 11:02, 바른번역에서 온 전화(였으나 샘플 마감기한 이후 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역시나 샘플 관련은 아니었고, 포브스코리아에서 급하게 (기한이 3일 후인 16일 정오까지였다) 10페이지 짜리 기사 번역을 의뢰했는데 가능한지 문의 내용이었다. 일단 기사를 보내주면 바로 확인하고 가능여부를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원고를 받아 분량을 보니 아니 내가 전업번역가도 아니고 안되겠다 싶어 메일 받은 지 20분 만에 안되겠다 죄송하다 답을 보냈다.

10.13 14:00 바른번역에서 오늘만 두 번째 온 전화. <Simple Rules> 번역가로 선정되었다는 전화였다. 출판사는 과연 내 샘플을 읽어보기는 한 것인가 의심이 드는 동시에, 제대로 안 읽어보고 선정했다면 안 읽어봐 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바른번역 이지은 팀장님은 출판사에서 12월 말까지 제출 원했으나 협상하여 1월 4일까지로 연기했다고 했다. 그 정도라면 마감날짜 늦춰지는 데 싫어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 때는 그렇게 끔찍한 결과가 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10.13 16:09 바른번역에서 메일이 옴. 포브스코리아 혹시 마감기한을 일요일 정오까지 하면 어떻겠냐는 내용. <Simple Rules> 마감기한이 연장된 것은 복선이었나 하는 즐거운 배신감이 들었으나 (물론 기분 나쁠 이유는 전혀 없다. 바른번역의 얇은 인력풀(풍부한 인력을 더 풍부한 일감이 압도하는)에게 감사하자) 마침 토요일이 첫째 어린이집 운동회 날이다. (이것이 내가 말한 가족행사의 정체다) 사양할 명분도 이유도 없는 듯 하여 '일요일 밤까지 하면 안 될지', 그리고 '안 된다고 하면 그냥 일요일 정오까지 하겠다'고 답장했다. 밤 새지 뭐.

10.13 16:13 바른번역에서 답장. 월요일 9시까지로 마감기한을 연장했다고 하심.

이렇게 다른 번역건까지 볼모로 잡힌 다사다난한 수주 경과를 거쳤다. 


2. 원어 병기

아시아 부자 가문 얘기다 보니 중국 인명이 많이 나온다. 문제는 병기명을 어떻게 할 것이냐인데, 예를 들어 李嘉誠을 이가성(한국 독음)이라 하느냐 리자청(보통화 발음 음역)이라 하느냐 리카싱(출신 지방 병음이 기초라고 추정되는 영어 표기명 재음역)이라 하느냐 문제다. 

출판사에 옵션 중 하나로 제시하기는 했으나 한국 독음은 애초에 답이 아닐 듯 했고, 보통화 발음은 발음 근거 찾기가 편하기는 하나(시험 통과용으로 공부하여 합격한 HSK 6급은 이 부분에서 이미 시간과 노력과 돈 값을 했다) 내 이름을 웨이다셴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영어 표기명 재음역은 광동화 등에 무지한 내 한계상 내 이름이 위대선인지 위다이선인지 위대순인지 위다이순인지 헷갈리기도 하려니와 한국인에게 어색할 듯 했다. (郭芳楓을 보통화대로 궈팡펑이라 읽는 편이 그래도 퀙홍픙(Kwek Hong Png)이라고 읽는 편보다는 덜 어색하지 않겠는가)

출판사에서는 단박에 보통화대로 해달라고 답이 왔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래서 일이 쉬워지지 않은 것이, 원문 인명은 출신지역 영어 표기명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홍콩/싱가포르에서 흔히 그렇듯 중국 인명이 아니라 '레이먼드', '에반' 같은 영어이름만 나온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보통화대로 하겠다고 한 이상 오기가 생긴 나는 모든 중국인명의 원어명(중국어)을 병기하기로 했다. 두 가지만 말한다면, (1) 원 중국인명을 찾기에는 구글보다 바이두가 좋았다. (2) 번역에 들인 총 시간 중 아마 반은 이 중국어명 찾는 데 소요되었을 것이다. Kwek Eik Sheng이 郭益升라는 사실은 원고 제출 9시간(수면/출근 시간 등 제외하면 사실상 마감시간)에서야 알아냈다. 곽익승 XXX...

그리고 이 전설이 슬픈 이유는 바로... 출간된 결과물에는 원어병기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데 있다. 특히 영어이름만 있는 사람은 그냥 영어이름만 표기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 됐어는 무슨 최선은 언제나 다하는 거고 과다노력을 했다는 게 결국 시간을 아끼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단 얘기다.


3. 제목

line으로 라임을 맞춘 것이 확연이 보이는데 '혈통과 이익' 따위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유의어대사전으로 2단계인가 3단계까지 들어가서야 두운을 찾아냈지만 이 정도로도 부족하지 않나 하던 차에 (1) 안기순 선생님은 '제목은 출판사가 정하는 거니까 안 해도 된다' (왜곡된 기억이라면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러나 왜곡되었다면 바로 왜곡되었기 때문에 제게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2) 그러니까 출판사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거야 하는 마음으로 그냥 넘겼다. 그리고 출판사는 이걸 그대로 썼다. 내가 제출한 안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서였다고 믿겠다.


4. 번역자명

잡지의 특성을 몰랐던 나는 기사에서 역자명을 찾았지만 없었다. 내 이름은 잡지 서지 부분에 다른 번역가 두 명 이름 뒤에 마지막으로 붙어 있다. 글자 크기는 한 5포인트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종합하면 모든 번역 건이 그렇듯 내용으로도 피와 살이 되고 금전적으로도 당연히 보탬이 되며 얘기거리로마저 한 획을 그은 즐거운 작업이었다.

Posted by TUNC AU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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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한 책 중 처음으로 출간된 책이다. 단독 번역된 책으로는 <Smart Growth> 이후 두 번째, 이름이 올라갈 역저로는 <Quest for Security> 이후 세 번째, 전체 역저로는 <Modernist Cuisine> 이후 네 번째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나머지 세 권은 대체 왜 안 나올까? 번역료는 받았으니 상관 없다면 없는 일이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걸린다. 물론 그렇다고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하여 받은 돈을 돌려줄 의향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간단한 감상을 말하자면, 현역 기업가이기에 '공유'라는 단어가 주는 일견 긍정적 편견에서 벗어나 공유경제를 개인/기업/정부 등 여러 각도에서 현실 그대로 분석했다는 데서 차별되는 책이다. 내가 번역했던 책이 모두 그랬듯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기보다는 좋은 책만 만났던 행운 덕분이라고 치자) 사물이나 개념을 새롭고도 균형잡힌 각도에서 보는 좋은 책이다.


추가 1. 나 같이 미천한 번역가에게는 증정본이 없는 줄 알고 YES24에서 신간 확인을 하자마자 일단 세 권을 사 하나는 소장하고, 나머지는 각각 그 다음 주 만날 약속이 있던 부모님과 동생 내외에게 전했다. 그 후 10.29일에 바른번역에서 증정본 세 권을 보내준다는 말을 들었다. 장인어른+장모님, 두 처남 내외에게 전할 예정이다.

추가 2. YES24에는 10.19 출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그리고 그 때부터 실제 주문도 가능했다) 교보문고에는 11.5 출간으로 나온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Posted by TUNC AU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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