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는 상품권이다.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은 그렇게 말한다. 미국이 중국에서 물건을 수입하고 낸 달러는, 결국 중국이 달러로 살 미국 물건이 없다면 아무 쓸모 없다. 중국이 직접 미국 물건을 살 때가 아니라, 다른 나라(예컨대 캐나다)에 진 빚을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로 갚는다면? 마찬가지다. 캐나다 역시 그렇게 받은 달러로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미국에서 물건을 사는 것 뿐이다. 그래서 수입은 결국 자기 나라 물건을 강매하는 행위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공기업에 다니다보니 가끔 온누리상품권이 급여를 일부 대체하는 차원에서(인지 아니면 노조 기금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온다. 주차가 쉽고 쇼핑하기도 편한 대형마트에 길들여진 현대인이 전통시장을 강제로 사용하게 만들자는 취지는 이해한다. 그러나 아이들도 어리고 시간도 없는 우리 집은 그래도 보통 할인마트를 가고, 넘쳐나는 온누리상품권은 부모님들께 드릴 때가 많다. 공짜로 드린다고 비난받을 일은 없을 텐데, 혹시 다른 사람에게 (가격을 약간 할인해서) 팔면 이는 비난받을만한 일일까? 온누리상품권을 사가는 사람은 결국 이를 가지고 전통시장에서 물건을 사야 할 것이다. 만약 이 사람이 차액을 남기고 다른 사람에게 다시 상품권을 판다 해도, 결국 마지막에 상품권을 손에 쥔 사람이 이 상품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전통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것 뿐이다. 결국 온누리상품권을 10만원어치 받은 사람이 이를 전통시장에서 다 쓰면 10만원만큼 이익을 누린 셈이고, 다른 사람에게 9만원을 받고 팔았다면 9만원만큼 이익을 누리고 1만원은 다른 사람에게 주었을 뿐이다. 어찌됐든 전통시장 매출은 10만원 증가 확정이다.
쌍방 이익이 줄어드는 경우는 상품권을 다 못썼을 때뿐인데, 예컨대 10만원어치 상품권을 받고 쓰다쓰다 7만원밖에 못 쓰고 3만원어치가 남았다면 상품권 받은 사람도 7만원만큼만 이익을 얻고, 전통시장 매출도 10만원이 아니라 7만원만 올라가는 셈이다. 게다가 소득세는 사용한 7만원만큼이 아니라 처음 받은 상품권 가치 10만원에 대해서 부과될 것이므로 상품권 받은 사람이 얻은 이익은 사실 7만원만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쌍방이 잃은 이익 3만원+a, 매출 3만원은 어떻게 해야 할까? 전통시장에서 물건을 살 일이 있는 사람에게 파는 편이 최선이다. 비록 처음에 상품권을 받은 사람이 누릴 이익은 10만원까지는 안되겠지만 7만원(-a)보다는 많아질 것이고, 전통시장 상인은 10만원 매출상승 효과를 모두 누릴 것이며, 상품권을 사서 쓴 사람은 싸게 상품권을 산 만큼 이익을 보게 될 것이다.
온누리상품권 할인(속칭 '깡')을 금지한다는 정책이 발표되었을 때는, 그래서 정부의 논리가 궁금해졌다. 상품권 거래 금지 뒤에서 전통시장을 가기가 상대적으로 편한 사람(그리고 상품권을 싸게 사서 이익을 얻을 사람)이 아니라, 상품권을 직접 받은 사람이 억지로 전통시장에 가야 한다는 논리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소비자의 총효익도 줄어들 것이고, 전통시장 매출 증가액도 아마 최대액(상품권 발행액 또는 상품권 거래 허용시 거래 기대액)보다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전통시장을 살리라고 준 상품권을 감히 현금으로 바꾸다니!'라고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온누리상품권은 달러 같은 일반 화폐보다도 더욱더 완벽한 상품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상품권을 사가는 사람은 결국 직접 쓰거나, 직접 쓸 사람에게 팔아야 한다. 그리고 상품권을 사용할 확률은 이를 '깡'하려는 사람보다 사려는 사람에게 높을 것이다. 결국 상품권 거래 허용은 (나는 도저히 정당하다고 판단하기 힘든 도덕적 기준을 제외하면) 전통시장 상인을 포함하여 모두에게 이익이다.
성남에서 시작한 청년배당 바우처가 시장에서 거래되어 논란이 된다고 한다. 청년들에게 소득을 주는 동시에 성남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바우처라 성남 내 경기도 활성화한다는 취지라는데, 거래 행위가 논란 대상이 되는지를 묻는다면 내 의견은 온누리상품권 경우와 같다. 바우처를 할인해서 판다면 손해를 보는 사람은 그 청년 뿐이다. 이를 손해보고 판 청년을 비난할 근거는 아무데도 없다. 오히려 그 청년에게 쓸모없는 성남 물건을 사야만 하는 바우처 형태로 청년배당을 지급했다는 사실을 비난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성남시가 (배당을 받지 못할 나머지) 성남 주민에게서 최소한의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 낼 수단이라는 데서는 이해할 만 하다. 이 정도가 청년배당 바우처 거래에 대한 의견이다.
그보다 더 큰 논쟁 대상은 과연 '청년배당은 정당한가?'일 것이다. 내 의견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청년배당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전국민 배당'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논거는 내가 지금 번역하고 있는 책에서 잘 다루고 있다. 신생 출판사 '갈마바람'에서 의뢰한 <With Liberty and Dividends>는 예전부터 내가 지니고 있었지만 깊이 고려해보지도 근거를 댈 생각도 못 하고 있던 주장에 정확하게 부합하면서 실제 사례와 기본적 정책 방향, 사상 근거를 조목조목 댄 책이다. 내가 번역 깽판만 치지 않는다면 (제발 그렇지 않기를 빈다) 상반기에 출간 예정이라 한다. 만에 하나 번역자에 내 이름이 실리지 않는다 해도 큰 반향을 일으켰으면 하는 책이다. (그렇다고 진짜 이름을 빼지는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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