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

기타 2016. 3. 13. 12:01

바둑돌을 잡지 않은지 - 라고 시작하기에는 대학교 이후부터 바둑을 온라인으로 두었으니, 타이젬에 접속하지 않은지라고 하는 편이 나을텐데, 어쨌든 마지막으로 그런 지 벌써 4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이 취미냐고 묻는다면? 이제 번역, 라즈베리파이, 외국어 등 보다 순위는 밀릴지라도 최소한 취미'군'에는 여전히 포함된다고 해야 한다. 며칠 전에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후보군으로도 생각나지 않았을 바둑을 다시 목록에 올리는 것은, 역시 알파고 때문이다.

컴퓨터 바둑대회에서 전승에 가까운 성적을 거두건, 판후이에게 5전 전승을 하건, 알파고가 일반인에게 관심을 끌 재료로는 크게 부족했다. 역시 실력으로나 지명도로나 세계 최고급인 이세돌과 경기를 한다 하니 나같은 냉담자는 물론이고 문외한조차 관심을 두게 된 상황을 보면, 우승상금 100만 달러를 걸었지만 이세돌이 거절하면 그 열 배도 낼 의향이 있었다는 구글의 계획은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나도 소식을 들은 후 몇 번이나 날짜를 확인했다.

1국이 열린 날은 평일이라 중계를 볼 수 없었다. 가끔 뉴스를 새로고침해도 딱히 불리하다는 얘기는 후반까지 나오지 않았다. 습관처럼 아무 기대 없이 새로고침을 누르다 '이세돌 불계패'라는 글자를 보았다. 그 때 느낀 충격은 그날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상대를 제대로 모르고 두었다는 1국, 단단하게 두었으나 밀렸다는 2국. 그리고 지금은 자기 스타일대로 두었으나 결국 돌을 던져 3국이 끝나고, 대회 승부가 난 다음날이다.

알파고의 CPU가 천 몇백개라서 불공정하다느니, 알파고는 이세돌의 기보를 공부했지만 이세돌은 알파고를 분석할 수 없었으니 불공평하다느니 하는 말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가치 없는 불평일 뿐이다. 애초에 이 대결의 본질은, 컴퓨터가 오목이나 체스 같이 '천박한' 게임이 아니라 바둑이라는 '심오한' 게임에서 사람을 이길 수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으니까. 또한 대결이 얻은 주목의 강도와는 무관하게, 알파고 자체는 스카이넷이나 매트릭스 같은 어두운 미래를 불러오지 않는다. 알파고는 매우 한정된 규칙과 공간 안에서 단일한 목표를 풀어내는 약인공지능에 불과하다.

알파고에게 치명적인 충격을 받은 것은 바둑의 본질이다. 인간의 심오한 사고, 동양문화의 정수가 담겼다는 바둑이 실제로는 계산기로 풀어낼 수 있는 숫자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리고 이제까지 그러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계산력이 부족해서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두터움과 엷음, 좋은 모양과 빈삼각 같은 나쁜 모양, 기세, 맛, 승부수 같은 개념은 부족한 연산력을 보충하기 위한 직관 또는 임시방편에 불과하고, 최소한 상대방보다 수를 더 깊고 넓게 읽어낼 수 있다면 그런 편법은 불필요하다. 써놓고 나면 당연한 얘기지만 알파고 이후에야 충격적인 형태로 반박 여지 없이 검증된 이야기다.

바둑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하여, 이세돌의 패배와는 관계 없이 바둑(업계)의 승리라는 의견도 많다. 관심 수준에서 본다면 확실히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바둑을 업으로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김빠지는 얘기이기도 하지 않을까? 100m 달리기 경기를 예로 든다면 (컴퓨터끼리 싸우는) 세계 육상선수권을 보겠느냐, (인간 기사끼리 싸우는) 전국체전을 보겠느냐는 선택에 비유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지나치게 후하다. 국내에서 척박한 분야 1인자가 세계 우승하는 일은 육상은 몰라도 피겨에서는 이미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인간이 바둑을 이기기는, 마치 사람이 주판을 (아니 많이 봐줘서 계산기를) 들고 컴퓨터를 상대로 눈높이수학 문제풀이 대결을 벌여 이길 가능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설령 오늘 또는 모레에 이세돌이 한 판이라도 얻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추후 이벤트 대국에서 사람이 알파고를 잡는 일이 일어난다 해도, 바둑이 계산력 대결이며 기계의 계산력이 비할 수 없이 우월하다는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바둑의 진리는 인간이 아니라 컴퓨터로 추구할 수밖에 없는 목표다. 4천년 동안 남은 수많은 '명국'은 이제 해부 후 빨간펜으로 수없이 지적당할 것이다. 그나마 과거 대국자는 대답할 수 없어 오히려 다행이지만, 지금 살아있는 취미(초보와 아마추어를 통틀어)/프로기사는 기계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절대자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탈것의 속도가 음속의 몇배에 달하는 지금도 육상선수는 있듯, 프로 바둑 산업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육상경기의 목표가 절대적 속도가 아니라 '인간 한계'의 초월에 있듯, 인간 바둑의 목표 역시 절대능력에 비하여 무력함을 인정한다는 전제 아래 '인간 중 최강자', '인간 계산력의 한계 초월'로 한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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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UNC AU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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