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가 쌓이면 옷이나 가방 쇼핑으로, 폭식으로 푸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도 다를 바 없다. 내 경우에는 책, 그것도 헌책이다. 3년 전 부산 살 때는 보수동 헌책방 거리가 나름대로 지역 명물이어서 회사를 땡땡이치고 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거리가 애매해서 몇 번 못 갔지만 어쨌든 그런 장소가 근처에 있다는 정도만 해도 마음이 안정되고 타향 생활에 진정제가 되며, 아직도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나를 (그것도 첫 애가 백일을 막 넘겼을 무렵) 보냈는지 이해할 수 없는데다 안그래도 심란한 마음을 다독이지는 못할 망정 속을 뒤집어놓던 김모 당시 과장에게 '시발 그럼 내가 때려치고 너 때문이라고 할테니 니가 가'라고 하고 싶던 마음이 사르륵 사라지는 정도였다고 하면 그건 물론 지나치게 나간 것이다. 그 정도 장점은 "'심지어!' 군대에 가서도 얻어올 것이 있다"는 정도 되는, 이삭줍기에 비할 만하다. 어쨌든 보수동은 그 정도 의미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부산에 처음 가 개소식 초청을 위해 시내를 돌아다닐 때 알라딘 헌책방을 발견하고 (지금 생각하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동행하던 금 팀장에게 '여기 들렀다 갈테니 이따 만나자'라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고, 부산에 가기 전 흑석동 시절에 가끔 용산을 갈 때는 헌책방계의 올드스쿨 전형이라 할 뿌리서점을 몇 번 들러 책을 사기도 팔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사는 동네에서 '조금 많이' 걸어가면 유명한 공씨책방, 얼마 전에 무려 할리스를 밀어내고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영업하는 글벗서점, 신촌 거리 한복판에 있는 알라딘 헌책방 신촌점이 있다.
보수동에 아쉽고 공씨책방에 아쉬운 것이라면 규모다. 공씨책방은 여기저기서 언급되는 빈도를 볼 때 오래 영업했다는 상징성은 있겠지만 이를 제외하면 그냥 조그마한 헌책방이다. 보수동에는 책방이 널렸지만, 내가 가본 중 대우서점, 우리글방, 대영서점 정도를 제외하면 다 규모가 고만고만하다. 헌책방에 규모가 왜 중요한가? 물론 찾는 책이 확실해서 주인에게 '이 책 있나요'라고 물어보는 사람에게는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상상하기로, 그렇게 물으면 주인은 책을 찾아주거나, 아니면 인근 서점에 연락해서 거래를 중개해줄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딱히 찾는 책 없이 서점에 간다. 그리고 책장의 미로를 몇 번이고 돌며 마음에 드는 제목과 표지를 찾아나선다. 매장 규모가 작으면 일단 들일 수 있는 책 수도 그만큼 한정된다. 공간 제약을 극복하고자 책을 쌓아놓으면, 이제 '헌책방' 하면 연상되는 옛날식 헌책방 그림이 나온다. 즉 쌓여 꺼낼 엄두가 안 나는 책이, 서가에 꽂혀 그나마 꺼내볼 수 있는 책을 가리는 것이다. 그냥 둘러보기도 불편하고 소득도 적으며, 그렇다고 다짜고짜 주인에게 가서 '제가 좋아할 만한 책을 골라주세요!'라고 물을 수도 없다. (게다가 그렇게 물었더니 일면식도 없던 주인이 꺼내온 책 몇 권이 진짜 내 마음에 든다면 이건 또 그 나름대로 으스스하다) 결국 나는 헌책방마저도 어느 정도 규모가 되고, 어느 정도 큐레이션이 된 곳을 선호하게 된다. 마음으로는 동네 상권 침식을 비난하면서도 발길은 결국 대형 할인점을 향하고, 본분 망각을 공격하면서도 알라딘 헌책방에 안 들어갈 수 없다. (물론 알라딘 헌책방에서 헌책계의 진짜 보석을 찾을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헌책방을 간다고 보석이 내 손에 잡히지는 않더라)
그래서 당분간은 글벗서점과 알라딘 신촌점이 주로 방문할 장소가 될 것이다. 기분이 울적한 요 2주동안 사댄 책이 저 사진에 나온 9권 + 아무리 방문자 없는 이곳이라도 지금은 공개하기 곤란하니 기다려달라고 말해야 할 1권이다.
- 고대중국의 이해, 사마천의 역사인식 : 나는 왜 글벗서점에서 이 두 권을 집었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이건 다 그 전에 번역하던 <Money Changes All> 때문에 <관자>를 회사 도서관에 신청해서 보고 <중국화폐사>를 '전설의 원서 중고책 치고는 싸다'며 충동구매 했던 감정의 흐름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 미용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고대중국의 이해>를 넘기고 있자니, 춘추전국시대 다른 나라에서는 가장 높은 관리가 相이었지만 초나라에서는 시종 令尹이었다는, 현실에 아무 도움 안 되지만 또 중국의 확실한 지방색을 느낄 수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두 권을 과연 1년 내에 읽게 될지는 확실치 않다.
- 어쩌고저쩌고 Civil War : 미국 쪽 책을 번역하다 보면 레퍼런스로 쓸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샀다. 그러고보면 첫 전자책인 <율리시즈 그랜트>(나는 왜 원어 발음을 하나하나 검토했으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제목은 표준표기안을 찾아보지 않은 것인가) 번역할 때 살 걸 그랬다. 그 다음 두 권과 함께 공씨책방에서 샀다.
- 손에 잡히는 아두이노 : 나는 라즈베리파이에 더 관심이 있지만, 그래도 기계 제어에는 아두이노가 낫다는 사실도 경험했다. 물론 지금처럼 시리얼 통신으로 제어하는 이상의 뭔가를 하게 될지는 역시 미지의 영역이나, 이 역시 '언젠가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때 불현듯 찾아본 이 책이 광명을 내려줄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집었다.
- 세계사를 품은 영어 이야기 : 취미로 번역을 하다보니 영어의 역사에도 관심이 간다. 굉장히 자세한 책이라기보다는 술술 읽히는 책에 가깝다. 그리고 굉장히 자세해서 한 번도 읽기 힘든 책의 효용과, 쉬워서 여러 번 읽히는 책의 효용은 딱 잘라 비교하기 힘들다.
- 백귀야행 베스트 下 : 백귀야행은 한때 내가 재미있게 보던 시리즈다. 부모님 댁에서 살 때 동생이 대여점에서 빌려와서 보기도 했고, 일부는 내가 사서 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흐름을 놓친 후 이제 20권대로 늘어난 이 책을 따라잡기는 버거울 듯하다. 하지만 베스트가 출동하면 어떨까? 알라딘에서 책등만 보고 그대로 집었는데, 아무래도 上도 사야 할 모양이다. 이렇게 충동구매는 후속구매를 부른다.
- 소유하지 않는 사랑 : 공씨책방에서 두 권짜리 릴케 시선을 보고 2권만 집었더니 같이 사야 한다고 하여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 전까지만 해도 이름이나 알던 릴케가 갑자기 읽고 싶어진 것은 옛날에 본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두이노의 비가' 번역 문제를 다룬 글이 떠올랐기 때문인 듯하다. (확신은 못 하겠다) 그래서 알라딘에 가자마자 릴케를 검색하고 집어들었다. 1년 전쯤 말당 서정주 전집 1권을 읽고 (그 중 특히 초기작에) 오랜만에 시에 감동했는데, 과연 외국 시 번역본은 감흥을 줄까?
- 공산당 선언 : <Money Changes All> 때문에 로욜라도서관에서 번역본 몇 권을 비교해 보고, (1) 중역보다는 직역, (2) 가능한 최신역, (3) 문장력에 큰 차이가 없으면 옮긴이의 관련 경력 (또한 공역보다는 1인역) 등 나의 원칙에 따라 고른 역본은... 이 책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하지만 뭐 읽어볼 만한 책이니까 샀다. 부연하면 이 책을 포함하여 <자본론>, <국부론> 같은 책은 번역하다 보면 레퍼런스로 자주 언급되는데, 책이 두꺼운데다 사 두고도 완독하려면 아마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읽은 다음이 되리라는 가능성 높은 예상 때문에 아마 읽기 전에 신판이 나올 듯해서 사기가 꺼려진다. 다만 김수행 교수가 고인이 된 지금, 당분간은 내 원칙에 부합하는 역본이 바뀔 가능성은 낮아 사둬도 되지 않나 하는 유혹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왜 재학중에 김수행 교수 강의를 하나도 듣지 않았던 것인가...
- Outsider : 번역본이 집에 있는데, 한번 원서로 읽어보자 -> 그런데 킨들로는 안 파네? -> 어차피 아마존 직구 할거니까 묶음배송 시켜야징 -> 어 초판 중고도 '그다지' 비싸지는 않잖아? 역시 책은 초판이지
하는 마음으로 처음으로 아마존에서 헌책을 주문했다... '영국' 초판이 아니라 '미국' 초판이라는 사실은 접어둔 채.. collectible이라던 커버는, '아 이 책방은 이런 커버도 collect하는구나'하는 깨달음을 주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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