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에 출판되었을 책이다.

지금 제목으로는 인터넷 서점에서 '절판'으로조차 검색되지 않는다.

해답편이 잘려나가 서지도 확인 불가하다. (그래서 출판 년도가 확실치 않다)

이 헌책의 가격은?


답 : 10,000원. 배송비 합하면 12,500원.



고등학생 때 학원 교재였다. 한낱 참고서를 (그것도 심각한 하자품을) 저 가격 주고 헌책으로 산 이유는 우선 기억에 남아서, 둘째 없으니까다.


저자는 고급 지문을 풍부하게 수록했다. '인용된 작품과 저자' 앞 몇 줄만 인용해 보아도 <A Little Cloud>(James Joyce), <A look at Our Schools>(P. Mort & W. Vincent), <A study of History>(Arnold J. Toynbee), <A writer's Notebook>(W. Somerset Maugham) 등등. 특별히 영어 관련 배경이 없는 고등학생이 읽기에는 부담스러워 보이는데, 그게 또 흥미로울 만한 부분만 짤막짤막하게 적혀 있다 보니 난이도도 적당하게 높으면서 기가 꺾일 만큼 지루하지 않았다. 요지가 계속 머리에 남아 있던 아래 사례를 이제 다시 들춰보니, 부모 처지에 선 지금 느낌이 새롭다. 완전히 동의하지도 않고 완전히 반대할 수도 없는 화두다.


A child develops best when, like a young plant, he is left undisturbed in the same soil. Too much travel, too much variety of impressions are not good for the young and cause them as they grow up to become incapable of enduring fruitful monotony. I do not mean that monotony has any merits of its own; I mean only that certain good things are not possible except where there is a certain degree of monotony.

- Bertrand Russell, <The Conquest of Happiness>



그런 책이 왜 없어졌느냐. 언젠가 시간이 나면 들춰보겠지 하는 마음으로 대학 진학 후에도 고이 모셔두던 책을 정말 써먹게 된 기회는 영어 과외였다. 영어만 못했다고 기억하는 동생 친구를 가르칠 때, 시작한 지 몇 달 지나 어느 정도 기초를 잡았다고 판단한 나는 이 책을 주고 매 번마다 지문 몇 개씩을 해석하는 숙제를 내 주었다. 해답도 같이 주었는지는 모르겠는데, 해답을 보며 숙제를 한다 해도 도움은 충분히 되었을 것이다. 그 후 어느 정도 지나자, 원래 실력과 지문의 난이도를 아는 나로서는 가끔 놀랄 만큼, 학생은 독해에 능해졌다. 이제는 혼자 공부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 나는 과외를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다 마치지 않은) 이 책은 보잘것없으나마 선물로 주었다. 그러고 나서 학생의 동생에게 수학 과외를 이어서 하게 된 일은 주제와는 별 상관 없는 이야기다.


선물로 주고 난 직후부터 나는 헌책방을 갈 때마다, 헌책방 사이트를 뒤질 때마다 이 책을 찾았다. 출판 시기가 꽤 오래되었고 추정컨대 그리 잘 팔리지도 않은 듯하다는 점이 지금까지 실패한 원인 중에서도 첫 번째이자 근본 이유라면, 두 번째이자 사소한 이유는 이 책 제목을 '그랜드 종합영어'로 잘못 기억했다는 것이다. 이는 검색 실패 뿐 아니라 검색 오류로까지 이어져, 웬 상태 안 좋은 중학교 영어책을 2,000원에 샀다가 바로 분리수거한 일까지 야기했다. (사이트에는 실물 사진이 없었다. 판매자도 누가 이런 걸 진짜 사네 하고 의아했을 것이다.)


길었던 지난 연휴 중 하루, 뿌리서점을 다녀온 후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키워드를 습관처럼 검색했다가 이 빨간 표지를 본 것이다. '해답쪽 뒤쪽이 없'읍'니다', '상태 : 하' 라는 내용은 즉시구매를 클릭하는 손가락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리하여 15년에 걸친 탐색은 결국 승리로 끝난 것이다. 아무리 나라도 이 책에 예컨대 5만원을 내야 한다면 주저했겠지만, 12,500원은 갈증을 풀기에 충분히 쓸 만한 금액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찾는 헌책은 이제 두 권으로 줄었다. 한 권은 물량은 꽤 있지만 절판되어 가격이 새책의 세 배로 올랐을 뿐이니 돈만 내면 살 수 있지만, 오기가 있어 아직 판매자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고 있다. (물론 이 책 판매자의 농간에는 넘어갔지만.) 그리고 한 권은 글벗서점에서 들춰본 러시아어 잡지인데, 제목도 호수도 모른다. 이건 평생 구할 수 없으리라. 결혼 전 아내가 말했던 대로, 마음에 드는 건 고민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사는 편이 돈과 시간을 절약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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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UNC AU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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