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번역이란 독서라는 제1취미를 가장 집요하고 심도있게 즐기는 수단이자, 취미를 하는데 돈까지 받는 경로다.
여기서 취미~부업이 AND 조건임을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돈이 아쉬워서 하는 일이 아닌 이상, 나는 하기 싫은 책을 번역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 데뷔를 하지 못했거나 일거리가 취미 관점에서도 지나치게 들어오지 않는다면 또 다른 얘기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번역한 책 중 하기 싫은 책은 없었다. (첨언하자면, 능력의 부족 때문에 지금 다시 맡으라면 고사해야 할 듯한 책은 한 권 있다. 밝히지는 않겠다.) 한편 취미기는 한데, 그럼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좋은 책이 있는데 재능기부 어떠냐'라고 한다면 단번에 '기부할 재능이 없다'고 자르겠다. 재능도 없거니와, 1주일 내내 아이들 재우고 난 밤 시간 + 주말 한나절(보통 오전)을 취미에 떳떳하고 뻔뻔하게 바치려면 명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두 가지를 한 번에 충족하는 것은 아주 좋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 단순 권수로만 따진 독서량은 번역 시작한 이후 줄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석달 기한을 받는 보통 책 한 권의 초벌번역만 빡빡하게 한달 반이 걸리고, 이걸 세 번 교정하는 데 조금 여유있게 한달이 걸린다고 치면 다음 번 일거리가 들어올 때까지 남는 시간은 두 주 뿐이다. 이 두 주를 만약 그냥 지나간다, 그리고 1년에 네 권을 한다 하면 여유있게 보내는 주는 1년 합쳐 두 달 뿐이다. 12개월이 2개월로 줄어드는데 100% 취미독서량에 영향이 없을리 없다. 게다가 작년 9월부터 시작한 <Money Changes Everything>은 분량도 보통 책 두 권 정도에다, 쐐기문자부터 시작되는 (금융)역사서라 자료조사에도 시간이 많이 들었다.
물론 지난 6개월 동안 읽은 자료 양과, 이를 이해한 질을 보통 취미독서와 비교하면 오히려 압도적이겠으나 어쨌든 제대로 읽은 책을 들라고 한다면 지난 9월에 읽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후 2월에서야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을 적을 수 있다. 이야기가 산으로 가지 않도록, 두 책 모두 매우 좋은 책이라고 언급해 두고 감상은 다음에 남기자. (정말 좋은 책이다.) 그 사이 몇 권을 지나, 3월 초에 주문한 책이 <춘추전국 이야기> 10권과 저 두 권이다. <춘추전국 이야기> 역시 매우 좋은 책이라고 언급하고 지나가자. 다만 분량이 하루에 읽을 책은 아닌 데 비하여, 저 두 권은 명목상 이틀, 사실상 하루만에 읽었다. 지난 반 년 동안 금융과 역사에 찌든 내 독서뇌는, 무언가 완전히 다른 주제에 굉장히 굶주려 있었던 듯하다.
우선 <당신에게 말을 건다>는 지방(그것도 부산이나 대전 같은 광역시조차 아니다!) 서점을 대를 이어 경영하는 젊은 경영자의 전략이 엿보이는 책일 것 같아 카트에 넣었는데, 막상 읽고 나니 가족애와 소소한 애환이 더욱 깊이 와닿았다. 의도하지 않은 내용이 오히려 좋았는데, 생각하면 이 책 자체가 내가 생각했던 전략을 (의도했든 아니든) 훌륭하게 구현하는 수단일 것이다. 속초에 가게 된다면 이 책을 들고 서점을 방문하여 사인을 받고, 다른 책 한 권을 산 후 닭강정을 먹겠다. (<외식의 품격> 저자라면 이 닭강정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겠다.) 이 책은 동아서점 뿐 아니라 대학교 때 몇 번 갔던 (내게 특별히 나쁜 도시도 좋은 도시도 아니었던) 속초의 매력까지 높인다.
<외식의 품격>은 저자의 블로그를 읽고 깊이 공감하여 샀다. 내 생각에, 저자가 방문한 후 비난을 피할 만한 집은 거의, 정말 거의 없다. 책을 읽고 나면 한국에는 원류를 제대로 연구하지도 않은 채 '입맛은 주관적이다'와 '우리 식'을 내세우고, 한편 터무니없는 값을 매기는 음식점밖에 없는 듯하다. 그래서 서평에는 건방지다느니 하는 얘기도 올라온다. 나라면 지식도 미각도 (어쩌면 다행히) 없는데다 분쟁도 꺼리는 성격상 저자처럼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저자에게 감사한다. 나 같이 싸울 능력도 의지도 없는 사람이 음식을 보는 관점을 바꾸고, 언제가 될 지는 몰라도 조금이라도 나은 외식을 즐기게 될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높아진다면 이는 저자와 같은 사람 덕분이다.
두 책을 산 이유 중에는 후원 목적도 있다. (아마 블로그에서였을텐데) 폐업하는 가게를 보고 '비싸서 잘 가지는 못했던 가게지만 없어진다니 아쉽네요'라는 평에 분노하는 <외식의 품격> 저자에 나는 우선 공감한다. 더하여, 저자의 의견과 상통하리라 생각하지만 확신은 없으니 순수한 내 생각임을 전제하고 쓴다. 상품의 질에 비하여, 아니 품질 값을 하지만 절대액이 비싸 사지 않는다면, 품목 자체가 글러먹어서든 생산자의 가치평가가 잘못되어서든 현 상태에서 그 잠재 소비자에게 그 상품은 존재가치가 없다.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가치를 지불해야 한다. 그렇게 모인 총 가치가 상품의 생산비용(기회비용 등을 포함한다)과 같다면 그것은 계속 남을 것이다. 내게 두 저자의 사고방식과 행동 이력에는 책값을 뛰어넘는 가치가 있었다. 사 놓기만 하고 도저히 읽지 못한 <금요일엔 돌아오렴>과 <다시 봄이 올 거예요>가 그렇듯. 그래서 나는 책값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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