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낯선 사람 만나기

1.

현대 사회로 접어들며 우리가 상실힌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상실하여 가장 뼈아픈 것은 공동체 정신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상상한다. 예전만 해도 '이웃의 정'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가차없는 익명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여기서 말하는 '가차없는 익명성'이란 사람들끼리 접촉할 때 경제적 이익이나 사회적 출세나 낭만적 사랑 등 제한적(?)이고 개인적인 목적을 위하는 상태를 말한다. (원문 확인 필요 - 익명성의 정의인가 성격인가)

공동체에 향수를 품는 배경 가운데 하나를 들자면, 곤경에 빠진 사람을 선뜻 돕기 꺼리게 된 현상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걱정하는 사회적 격리의 증상들, 예컨대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지 못하거나 쇼핑을 마치고 무거운 짐을 들고 돌아오는 나이 지긋한 이웃을 도와주지 못하는 등은 오히려 사소하다.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교육`계층`직업이 형성한 일종의 부족끼리 사는 게토에 갇혀 살고, 그 밖에 사는 사람은 일종의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밖에 사는 사람들도 자신이 편하게 어울리며 공감할 만한 집단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한다. 초면인 사람과 공공장소에서 즉흥적으로 시작하는 대화는 일은 특이하고도 유별난 일일 것이다. 나이가 서른을 넘어가면, 친구를 새로 사귀는 것 조차도 놀라운 일이 된다.

공동체 정신이 훼손된 이유를 찾아내려다 보면 듣게 되는 전통적 설명은 19세기에 유럽과 미국에서 발생한 신앙의 개인화가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신에게 공동으로 예배를 올리지 않게 된 바로 그 시기에, 이웃도 무시하기 시작했다고 역사가는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듣다 보면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그 시기 이전에 종교는 무슨 일을 하여 공동체 정신을 드높였을까? 그리고 이런 현실적 의문도 떠오른다. 공동체 정신이 한때 신학적 상부구조와 밀접히 연관되었다면, 세속 사회는 과연 그런 개념 없이도 공동체 정신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 종교에 근거를 두지 않고도 과연 공동체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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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논쟁의 양쪽 진영 가운데 한쪽을 편드는 사람라면 누구든 이 책에서 펴는 전략의 개요를 못마땅해 할 것이다. 종교 지지자라면 자기의 신조를 이토록 세련되지도 포괄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은 방법으로 검토한다는 사실을 일종의 모욕으로 간주할 지도 모른다. 종교란 뷔페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가장 좋아하는 것만 고를 수는 없다고 항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자가 접시에 담긴 음식을 모조리 먹어야 한다고 비합리적으로 고집하다가 몰락한 신앙이 적지 않다. 조토의 프레스코화가 묘사하는 순종을 감상하는 동시에, 수태고지 교리를 건너뛰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를 존중하는 동시에, 불교의 내세 이론을 멀리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문학 애호가가 수많은 고전 중에서 특히 좋아하는 작가 몇 명을 골라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여러 신앙에서 이런저런 요소를 차용하는 것도 결코 죄가 아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종교는 세계 21대 종교 가운데서 겨우 세 개 뿐이지만, 그 원인이 편애나 조급증(?) 때문은 아니다. 이 책의 비교 대상이 여러 종교들끼리가 아니라 종교 전반과 세속 영역이다 보니 나타난 결과일 뿐이다.

호전적 무신론자가 이 책을 본다면, 종교가 인간의 갈망을 끊임없이 재는 기준인 양 간주하려는 데 격분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여러 종교가 극단적이고도 제도적인 방식으로 불관용을 실현했다는 사실 뿐 아니라, 예술과 과학도 종교에 못지 않게 풍부한 위안과 통찰을 (그것도 더욱 논리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제공한다는 사실까지 지적하리라. 이렇게도 덧붙여 반문할 지 모른다. 종교의 여러 면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털어놓는 사람들이, 다시 말해 동정수태론에 동의하지도 않고 토끼가 붓다로 환생했다는 본생경 내용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종교라는 주제와 왜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 하는가?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종교는 종교 특유의 순수한 개념적 야심을 지녔기 때문에, 또 세속 제도로 시도한 적이 없던 방식으로 세계를 바꿔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관심을 가질 가치가 확실히 있다고 말이다. 종교는 윤리학과 형이상학 이론을 교육`패션`정치`여행`숙박업`입교의례`출판`미술`건축 분야의 실제 참여를 조합했다. (이러한 관심 범위에만 비교하더라도 세속에서 가장 위대했고 가장 영향력 있던 운동이나 개인의 성취조차 무색해질 것이다) 이처럼 이제껏 지구상에서 목격된 교육적이고 지적인 운동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례를 본다면, 관념의 전파와 영향력에 관심을 둔 사람이 매료되지 않을 리 없다.

 

5.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몇 가지 특정 종교를 정당화하려 하지 않는다. 종교마다 저마다 옹호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 책에서는 종교 생활의 여러 측면 중에서도 세속 사회의 여러 문제에 적용하여 효과를 거둘 만한 개념을 검토하려 한다. 그리고 종교 특유의 독단적 측면을 제거함으로써, 가뜩이나 회의적인 현대인이 골치 아픈 이 행성에서 유한한 생애 동안 마주치는 재난과 슬픔에 시의적절하게 위안을 주는 부분을 찾아내려 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 진실해 보이지 않는 모든 것으로부터, 여전히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슬기로운 것을 구해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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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철저한 무신론 가정에서 자랐다. 세속적 유대인인 부모님이 생각하기에 신앙이란 산타클로스와 관련된 그 어떤 것 정도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누이동생을 울리고 만 적도 있다. 신이 지구를 떠났더라도 우주 어딘가에는 살고 있을 거라는 순수한 생각을 동생에게서 몰아내려다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 누이는 고작 여덟 살이었다. 부모님은 자기와 사귀는 집단에서 종교적 감상을 은밀히 품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마치 퇴행성 질환을 진단받은 사람을 보듯 측은한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그를 다시는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부모님의 태도에 강한 영향을 받았지만, 20대 중반에 신앙 문제로 위기를 겪었다. 바흐의 칸타타를 들으며 비롯된 의구심은 조반니 벨리니의 성모 그림을 보며 더욱 발전했고 禪 건축에 입문하면서 점점 더 나를 압도했다. 그러다 몇 해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당신은 런던 북서부 윌스든 소재 유대인 묘지에 히브리어를 새긴 비석 아래에 누우셨다. 이보다 세속적인 장례를 직접 준비하지는 못하셨기 때문이다) 비로소 어린 시절에 주입당한 교조적 원칙을 모호하게나마 스스로 어떻게 느꼈는지 직시하게 되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만은 내 일생에 한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초자연적 사상에 굴복하지 않고도 종교와 관계를 맺는 방법이 있으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간단히 해방감을 느꼈다. 조금 더 추상적으로(?) 설명하자면, 아버지에 관한 애틋한 추억을 망치지 않고도 교부들을 생각하는 방법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가령 내가 내세나 천국의 거주민을 다룬 이론에 계속 저항감을 느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여러 신앙에 관련된 음악, 건물, 기도, 의식, 축제, 성묘(?), 순례, 공동 식사(?), 채색 필사본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깨달았다.

세속 사회는 신앙의 여러 관습과 주제를 상실함으로써 불공평할 정도로(?) 빈곤해졌다. 보통 무신론자라면 그런 관습이나 주제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말을 유용하게 인용하자면, 그런 것들은 '종교의 악취'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덕'이라는 단어를 점차 꺼리게 되었고, 설교를 듣는다는 상상만 해도 격분한다. 우리는 예술이 무엇인가를 고양한다는 생각이나, 예술이 윤리적 사명을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났다. 우리는 순례를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신전을 지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감사를 세련되게 표하는 절차가 없다. 고상한 사람에게는 자기계발 서적을 읽는다는 생각마저도 터무니없다. 우리는 정신을 훈련하는 일을 거부한다. 낯선 사람과 함께 노래하는 일은 드물다. 예컨대 비물질적 신이라는 기묘한 개념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위안을 주거나 섬세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매력적인 의식을 그냥 포기해 버리는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것을 세속 사회에서 찾아다니느라 고생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불쾌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렇게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한 결과, 우리는 원래 인류 모두의 소유라고 할 만한 어떤 것, 그리고 세속적 영역에서 다시 이용한다고 해서 딱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는 어떤 것을 종교가 종교에서만 경험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도록 허용한 셈이다. 초기 기독교만 해도 다른 종교의 좋은 발상을 능숙하게 재사용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수없이 많은 이교 관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현대 무신론자조차도 그런 관습이 처음부터 기독교의 관습이었다고 오해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을 정도다. 예컨대 신흥 종교였던 시절의 기독교는 동지 축제를 받아들이고 크리스마스로 포장했다. 또 철학적 공동체의 생활을 다룬 에피쿠로스주의의 이상을 흡수하고 변형한 것이 오늘날 말하는 수도원주의다. 로마 제국이 폐허로 변할 때, 한때 이교의 영웅과 주제에 바쳤던 신전이 껍데기만 남자 기독교가 그 안을 재빨리 파고들었다.

무신론자가 직면한 문제는, 종교적 식민화 과정을 역전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종교의 관념과 인식을, (이를 소유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종교 제도로부터 분리하느냐는 문제다. 예컨대 크리스마스를 이루는 훌륭한 요소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작 그리스도의 탄생과 아무 관계가 없다. 즉 크리스마스와 관계된 주제는 공동체, 축제, 갱생인데, 이는 기독교가 영향을 끼치기 수백 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에 직결된 필요 요소(?)조차도 일찍부터 종교 특유의 색조에서 벗어날 채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여러 신앙을 독해해 보려 한다. 주된 대상은 기독교이고, 그보다는 덜하더라도 유대교와 불교도 독해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세속적 삶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통찰을, 특히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나 정신적`신체적 고통이라는 문제에 관한 통찰을 찾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의 근본 논지는 세속주의가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치게 세속화한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관념을 벗어던지던 와중에, 매우 유용하고 매력적인 여러 요소조차도 포기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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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종교를 두고 던질 만한 질문 중에 재미도 없고 쓸모도 없기로 제일이라면, 그 종교가 '진실'하냐고 묻는 것이다. 여기서 '진실하냐'는 말은, 그 종교가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왔느냐, 그리고 예언자와 천사가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관장하느냐는 의미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독자를 잃어버릴 지도 모르지만, 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련다. "하늘에서 받았느냐는 기준에 댄다면 진실한 종교는 하나도 없다"고. 나는 기적, 영혼, 불타는 덤불 같은 이야기를 도저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리고 몬테풀치아노의 성 아그네스 같이 비범한 사람들의 위업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 (전설에 따르면 성 아그네스는 기도하는 동안 땅에서 반 미터나 떠올랐고 죽은 아이를 되살리기도 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토스카나 남부에서 천사에게 업혀 하늘나라로 올라왔다는 전설도 있다.)

 

2. 신이 부재함을 증명하는 것은 무신론자에게 일종의 오락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냉정하게 종교를 비판하여 종교인이 아둔함을 가차없고 치밀하게 세상에 드러내는 데서 큰 기쁨을 찾고, 자신의 적이 온전히 바보거나 미쳤다는 사실을 충분히 드러냈다고 느껴서야 공격을 멈춘다.

그런 과제도 나름대로 만족감을 주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쟁점은, 신이 존재하느냐 부재하느냐가 아니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결론지은 사람이 그 결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이 책의 전제는, 무신론을 계속 철저히 지키는 사람도 때로는 종교가 유용하고 흥미로우며 위안을 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종교에 얽힌 관념과 실천 가운데서도 세속으로 끌어올 부분이 있다는 흥미로운 가능성도 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이나 불교의 팔정도 같은 교리에 냉담한 사람이라도, 종교가 복음을 전하고 도덕을 장려하며 공동체 정신을 강화하고 미술과 건축을 발전시키며 여행에 영감을 불어넣고 정신을 단련하며 봄의 아름다움에 감사하게 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둘 수 있다. 세상에는 종교와 세속을 가리지 않고 갖가지 근본주의자가 출몰하지만, 종교적 신념에 대한 반대와 종교적 제의 및 개념에 대한 선별적 경의 사이에서 일종의 균형을 잡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

'종교란 하늘나라가 인간에게 내려준 것'이거나 '완전히 엉터리에 불과한 것'이라는 이분법 사고방식을 버린다면 문제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그렇게 된다면 종교가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 발명품이 지금도 존재하는 (그리고 세속의 어떤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던) 두 가지 필요를 충족하려고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두 가지 필요 중 첫째는, 비록 우리 몸 속에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이 깊이 뿌리박혀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직업에서 실패하고 인간관계가 꼬이고 가족이 죽고 자신이 늙고 죽는 등 인간의 나약함이 불러일으키는 끔찍한 고통에 대처해야 하는 필요성이다. 정말 신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던 여러 가지 절박한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는 지금도 해결책이 필요하다. 마태복음 제14장에 나오는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 이야기가 과학적으로 진실이 아니라고 누군가가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해결책 말이다.

현대 무신론의 오류는 어떤 신앙의 핵심 교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더라도 여전히 타당한 측면이 무척 많다는 사실을 간과한 데 있다. 사람이 종교에 굴복하거나 종교를 모독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면, 종교라는 것이 갖가지 정교한 개념을 담은 저장고라는 사실을 얼마든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세속에서 마주치는 질환 가운데서도 가장 끈질기고 대책도 없는 것 중 몇 가지를 완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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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이라고 하니 언젠가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일단 분량 때문에 손에 잡기 힘들고, 굳게 마음먹고 책을 펼쳐도 도무지 진척되지 않는 줄거리에 러시아 고유명사의 향연에 결국 몇 번이나 덮게 되는 고전. 그러다 큰 병에라도 걸려 몇 주 몇 달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을 때, 사 놓거나 읽어 볼 만하다는 책은 이미 다 읽어버려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을 때에야 손을 뻗게 된다는 악몽같은 책.

 

이상은 벌써 20년도 넘은 입시생 때 학원 강사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묘사한 대목이다. (정작 그 과목이 국어나 문학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얼마나 인상이 깊었으면 강의와 아무런 맥락도 없이 나왔을 말이 세월을 이겨내고 강사의 표정과 함께 떠오를 정도다.

 

그리고 오늘 나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끝까지 읽었다. 본작이 아니라, 존 르카레의 <Honourable Schoolboy>를.

 

반 년 전 여행 때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를 읽고, 조금 뒤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보고 나서 나는 <TTSS> 캐스팅을 유지한 후속작으로 <Smiley's People>이 나올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극장에서 보겠다는 목표 1, 영화가 나오기 전에 원작을 읽겠다는 목표 2, 그리고 <The Call from the Dead>부터 <SP>까지 스마일리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겠다는 목표 3을 (그리고 읽어야 하는 책이라면 번역본으로, 영문판이 원서고 재미 때문에 읽는다면 원서로 읽는다는 원칙 상 모두 원서로 읽겠다는 기본 목표0까지) 충족하기 위해, 한 권만 배송해도 전 세계 무료인 Bookdepository (왜 갑자기 광고비도 안 받는 광고 분위기..)에서 다섯 권을 한 번에 주문했다. (<The Looking Glass War>는 일단 영화와 관계 없을테니 제외했다) 

 

첩보소설을 기대했더니 추리소설에 가까웠던 앞 두 권, 내용과 암시는 어찌됐든 앉아있으면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나는 영화는 책과 다르다는 깨달음을 준 <TTSS>. 그리고 <HS>는 옛날 BBC 드라마로도, 이번 영화로도 영상화를 검토만 하다 결국 건너뛰기로 했다는 책이다. 하지만 시리즈에서 그렇게 건너 뛰는 책이 있다면, 후속작에서 어느 정도 이야기를 다루지 않을까, 그렇다면 읽어야 영화도 여러 내용을 빠짐없이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SP>를 보기 전에 <HS>를 먼저 보기로 했다.

 

일단 분량이 압도한다. 팸플릿 같던 첫 두 권, 분량으로 여전히 부담 없어 보이던 <추운 스파이>를 쓸 때까지 저자는 작가를 취미로 하던 양반이었는데, 세 번째 작품이 대성공하면서 회사를 때려치고 전업 작가가 되는 한편, 가용 시간이 급증함에 따라 작품 분량도 급증하였다 한다. 그래도 <LGW>는 288페이지까지만 늘어났지만, 급기야 <TTSS>는 416페이지로... 한국어책도 400페이지 넘어가면 분량 부담이 없다고 하기 힘든데, <TTSS>는 냉전의 음울함과 첩보전의 신경쇠약을 문체와 내용 뿐 아니라 분량에서부터 구현했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HS>는 688페이지 짜리다.

 

이 책을 처음 펴고 다 읽는 데 다섯 달이 걸렸다. 물론 5개월 동안 이 책만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그랬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대단한 일이지만.) 첫 두세 챕터 읽다 던져두고, 다시 1장부터 읽고 하기를 세 번은 했다. 한 100페이지 넘어가니 그 동안 읽은 노력이 아까워 '정석 공부할 때마다 행렬만 열심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이를 악물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여름 여행 때는 10시쯤부터 가족이 자느라 호텔 방 불을 끄면 로비로 내려와 한두 장씩 읽어냈고 (그 동안 책 보다가 조는 아름답지 못한 장면도 연출했다. 방에서 잠이나 자지 왜 1시간 넘게 로비 소파에 앉아 책 읽는 척 하며 불편하게 하는지 귀찮아하셨을 직원분들 죄송) 400페이지 넘어가면서는 첫째 눈높이 풀듯 자기 전에 한 챕터 씩 풀..아니 읽다가, 오늘은 아예 이놈의 책 끝을 내겠다는 마음으로 말복 한낮에 감히 집 밖으로 나와 카페에 죽치고 앉았다.

 

나중에 어떻게 평가받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최소한 지금 이 책이 <형제들>처럼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은 것도 아니고, <TTSS>나 <SP>처럼 영화화된 유명한 소설도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렇게 기록을 남겨놓는 것은 누가 안 시켰는데 거의 700페이지짜리 원서를 읽어 낸 자랑스러움에서다. (번역가는 원서 읽기가 더 편하지 않나요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내 경우에는 '오히려 그렇지 못해서' 내지 '이해 못하는 데 약이 올라서' 번역을 시작한 데 가깝다. 그리고 안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대부분은 나와 비슷하거나, 최소한 '영어 책 당연히 읽기 어렵지'인 듯)

 

그런데 신기한 것이, 더 짧은 <TTSS>는 당분간 다시 읽을 마음이 없는데 <HS>는 '언제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라는 대체재가 있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TTSS>의 칙칙하고 끈적한 분위기는 영화를 보나 책을 보나 어느 정도 비슷했으니 빨리감기의 도움을 받아 영화를 보는 편이 간편하고 시간도 절약된다. 반면 <HS>는 다른 방법이 없다. 또 영화를 비롯해 다른 정보원천이 있는 <TTSS>와 달리, <HS>는 덜 유명한 탓에 이 외에 내용을 알 방법이 없다. 여지껏 여러 내용에서 암시했듯, 이번 독서의 목표는 완독이지 정독이 아니다보니 안구만 움직이고 뇌는 움직이지 않은 부분이 반 이상일지도 모른다. (좀 심해 보이지만, 잠재의식에는 남아 있을 거라고 위안한다) 기본 줄거리 말고는 내용을 반이나 이해했을까? 그러다보니 추억보정으로 '돌이켜보니 재미있는 것 같았어'하는 생각이 벌써 들어 한편으로 소름끼친다.

 

그리고 다음 작인 <SP>는 다시 간소하게(?) 432페이지로 줄어든다. 열탕에서 온탕 갈때와 냉탕에서 온탕 갈때 다르듯, 책이 얇아보이기까지 한다. 심지어 <HS> 다 읽은 오늘 슬쩍 집어들고 한 페이지 읽기까지 했다. 바로 덮었지만.. 뜬금없는 마무리지만, 르카레 선생께서 이제껏 부업 작가로 남았다면 지구의 나무는 살리고 독자의 시간은 절약하며 이야기의 밀도는 높아지는 긍정적 효과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킴 필비 개자식.. 공산주의 정보기관의 진정한 해악) 물론 공평하게 말하자면 내용이 아니라 문체와 분위기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고, 지금 나온 스마일리 시리즈나 다 완결되었을지조차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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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1년 1번역을 실천하듯 2019년도 반이 넘어간 시점에서 <달러는 왜 비트코인을 싫어하는가> 출간 이후 1년만에 나온 책이지만, 이미 썼듯 사실은 납품한 지 2년도 넘은 시점에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출간되었다. 누군가에게 책을 줘야 하는 타이밍에 도저히 맞추지 못할 것 같아 결국 증정본이 오기 전에 내 돈 내고 오프라인 서점에서 사서 전달했는데, 또 납품에서 출간까지 걸린 시간에 비하면 번개같이 증정본이 도착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권은 안 사도 됐을텐데) 심지어 여름 여행으로 집을 며칠 비우게 된 첫날에 집 앞에 도착할 정도로. (아예 선택지가 없었으면 모르겠지만, 택배기사에게 남길 메시지를 선택할 수 있대서 '경비실에 맡겨주세요'를 눌렀건만 여행에서 돌아온 나를 (예상을 뒤엎지 않고) 문앞에서 고이 기다리고 있던 총 3,600페이지짜리 택배상자...)

 

옮긴이의 말에 썼듯 '원서는 훌륭했다'는 말은 자신있게 할 수 있고, 최소한 '긴가민가하면서 그냥 뭉개버린' 구절은 없다는 말까지도 할 수 있다. 물론 이 말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므로 내가 '이 책에는 오역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오역일 것 같은데 저자에게 확인하지 않고 가슴에 묻은' 부분은 없다는 말이고, 오역일 가능성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은 자신있게 넘어갔으리라는 말이다. 다시 럼스펠드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명언을 반복하자면, 'known unknown'은 최소한 저자에게 물어보기는 했을지언정 'unknown unknown'은 그냥 unknown인 채로 묻혔을 것이다. (이거 옮긴이의 말 초안에 넣었다가 1. 욕을 먹든가 2. 어차피 편집자가 고칠 것 같아서 (이미 '전문직의 미래'에서 경험한 일) 알아서 뺐다)

 

다만 옮긴이의 말 관련하여 여기에만 기록을 남겨놓는다. 본문도 그렇지만, 옮긴이의 말이라면 출판 전에 절차상으로나마 (즉, 옮긴이의 의견을 반영하든 하지 않든) 번역자에게 확인은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 '이게 웬일인가!' 같은 표현은 내가 쓴 것이 아니고 (나는 훨씬 심심하게 쓴다), 또 내가 제출한 안에서는 문장을 존대말로 썼다. 다시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편집자나 독자가 보기에는 교정본이 결과적으로 옳을 수 있다. 다만, 비록 주석과 그림 출처조차 모두 끝난, 정말 책의 마지막 부분에 세 쪽으로 들어가는 하찮은 옮긴이의 말이라 해도 최소한 찍혀 나오기 전에 보여주기나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어쨌든 책은 잘 나왔고, 가격에 비하면 생각보다 잘 팔리는 듯하며, 게다가 출판사 이름 역시 (무게감으로 먹고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이 아니라 (무게감은 덜한 대신 팔림성은 더해 보이는) '지식의날개'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마동팔 검사의 극대노를 불러일으킬) 표현대로, 번역자는 싫어도 원저자는 싫어하지 않는 정신으로 집안에 한 권 들여놓으면 특유의 두께 덕분에 빙하시대에 땔감으로 써도 얇아빠진 보통 책보다 며칠은 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고 목침으로도 훌륭하며 웬만한 총알도 막아줄 가정의 필수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소하게는, '남해 거품 사건' 같이 웬만한 금융사 책에서는 첫머리에 나오지만 사실 엊그제 일어난 일부터가 아니라 (그리고 로마제국은 그제 쯤 멸망했음), 뜬금없이 쐐기문자부터 나와버리고 춘추전국시대 관자를 들먹이는, 금융을 빙자하여 인류 역사를 조망해버리는 터무니없는 스케일도 즐겨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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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사전

기타 2019. 3. 10. 00:16

국민학생 쯤 부터였을까, 모르는 단어 뜻을 물으면 아버지는 "사전을 찾아 봐라."라고 말씀하셨다. "아니 내가 사전을 찾을 줄 몰라서 여쭤 본 것도 아니고..."라고 불만을 나누던 동생에게 깊이 공감하던 시절이었다. 지난 설 연휴 때 들은 일인데, 아버지와 터울이 꽤 지는 작은아버지 두 분도 어린 시절에 아버지께 단어 뜻을 물으면 그런 대답을 들으셨던 모양이다. 50년도 전에 들었을 (그리고 나와 동생이 그랬듯 몇 번 듣고는 다시 청하지 않았을 테니 그리 많이 반복하여 듣지도 않았을) 그런 대답이 '정말 듣기 싫은 말'이었다고 말씀하셨을 정도니까.


사실 동생이 불만을 나눴을 때 쯤이면, 나는 아버지께 묻지 않고 사전을 찾기 시작한 지 이미 2년이 되어 아버지가 왜 그렇게 대응하셨는지 어렴풋이나마 알았을 것이다. 정확한 뜻을 알려주기에는 사전보다 뛰어날 수 없을 것이고, 단어 공부나마 혼자 해결하는 습관을 들이는 데도 물고기를 달라고 하는 아이에게 잡을 방법을 알고 잡을 도구도 있으니 직접 잡으라고 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 


물론 당시 관점으로만 봐도, 아무 결점 없이 긍정할 일은 아니었다. 의도야 어쨌든, 내가 받을 수 있음을 당연히 아는 것을 거부당한 그 시점이 부모님께 거리감을 느낀 첫 기억이었다. '이제는 가능한 한 스스로 해결해야겠구나' 하는 자립심 또는 고립감. 자녀는 언제가 되었든 부모를 떠나게 되고 또 떠나야 하니 그 결점 역시 사실은 결점조차 아니라 할지라도.


아니, 정말 결점이 아닐까? 모르면 일단 책을 찾고 혼자 해결해 보려는 태도라면 최소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시험 점수를 잘 받는 데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책을 찾고 공부하는 과정은 혼자 해야 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우선 잘 알 만한 사람에게 묻고, 잘 풀리면 아예 맡겨버리는 (그리고 그 만큼을 도와주는) 방법이 '혼자 하는' 방법보다 나은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아는 지금으로서는, 그런 '도움받고 도와주는'  방법에 저항감이 덜하고 또 능하게 되는 편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가 초등학교에서 5일을 보낸 후 처음 맞는 주말이었다. 첫째가 단어 뜻을 물으면 아직은 아는 한 친절히 대답하고 있다. 몇 달 전 사전 찾는 법을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사전으로 해결할 마음이 전혀 없는 듯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한 마디면 미흡하나마 바로 대답해 주는 생체사전이 바로 옆에 있는데. 하지만, 생체사전의 비루한 능력을 고려하면 사전을 우선 찾는 습관은 역시 중요하다. 한편, 나보다는 책에 덜 매달리고 사람에 더 의지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아빠, 공허가 뭐야?"라는 질문에 있는 지식 없는 지식 다 동원하여 "아, 공허란 빌 공 자에 빌 허 자를 쓰는 단어니까 텅 비었다는 뜻이야."라고 적극적으로 대답하거나 "이제 초등학생이니까 사전을 찾아 보렴"하고 냉정하게 대답하지 않고, "아빠는 잘 모르겠네? 사전을 찾아봐야겠는걸?"하고 따뜻한 (아니, 최소한 차갑지 않은) 소극적 방법을 사용하는 편이 어떨까 싶다. 그렇게 쓰고 나니, 40 평생 내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말 몰라서 모른다고 답한 것이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깨달음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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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겠다는 결정은 정치적 결정이지만 자동차를 소유하겠다는 결정은 (정치적 결정이) 아닌 것처럼."


'The Unexpected Tales'나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는 내게 'page (fast) turner'였다. 그만큼 재미있었다는 이야기다. 정 반대로, 'page (slow) turner'도 재미있게 읽었다는 표현이 된 사례가 이 책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명문'이라고 한다면 그건 물론 과장이겠지만, 방심하고 읽다 보면 한두 페이지마다 한 번씩은 표현으로든 내용으로든 전개 방식으로든 (진부한 표현이지만, 진부한 표현 그대로) 뒤통수를 맞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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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준비를 하던 시절, 강사가 학원 수업 시간에 이런 얘기를 했다. “왜, 독서실에서 공부 하다 보면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하는 때가 있지 않니? 빈도로 따지자면... 일년에 한 번 정도?”

외서도 그렇다. 한국어 책이라면, 설령 학술서라도 관심있는 주제를 명확히 다뤘을 경우 초반 적응기만 잘 버티면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반면 어쩔 수 없는 단일 모국어 구사자인 내게 외서 독서는 일종의 ‘업적’이자 고행이라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마치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처럼 읽은 분량과 남은 분량을 끊임없이 의식해 가며, ‘괴롭지만 어쨌든 포기하기 전에 한 발 더 딛어 보는’ 마음가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예외라고 하면 (만으로) 38년 평생 두 권이나 있었을까. 군 시절 영어공부나 할까 하고 사서 당직을 서던 날 저녁에 펼쳤다가 단숨에 읽었던 <Angels & Demons>(그렇다, 댄 브라운 소설이다)가 그랬고, 대학 영어수업 교재에 실린 단편이 흥미로워 회계법인 시절 샀던 로알드 달의 <Tales of the Unexpected>가 그랬다. 특히 <Tales>는 읽으면 읽을수록 남은 페이지가 줄어들어 안타깝기까지 한 신비체험을 할 정도였고.

그리고 요즘 세 번째 예외를 만났다. 지난 연말 해외여행에 가져가려고 샀다가, 감기가 드는 바람에 가족들이 수영하는 동안 풀사이드에 누워 읽기 시작한 책이 존 르카레의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다. 적도 근처 리조트에서 냉전기 첩보소설을 읽고 있으려니 분위기도 맞지 않고 (그러고 보면 같은 장소에서 바로 앞에 읽은 책은 한강의 <흰>이다. 장소가 안 어울리기로는 <Spy>보다 더하고, 흥미롭기는 못지 않았다) 감정이입도 잘 안 되어, ‘세 시간 동안 먼 산 아니 먼 바다 바라보기보단 낫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리고 중반을 넘어갈 무렵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는데, 돌아오는 내내 페이퍼백에 몸을 기울이고 독서를 끝냈다. 혹시 다 읽기 전에 도착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과정, 반전, 결말에 현실 비판 모두 업계 경험자이기에 설득력을 더할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르카레 옹의 작품은 첫 작품부터 다 읽을 생각으로 2주 전에 bookdepository에서 일단 세 권을 주문했다. 그리고 <Tinker Tailor Soldier Spy> 영화를 올해 안에 봐야겠다. 후속작이 개봉하기 전에 원작을 (출간 순서에 맞춰) 읽고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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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점에 깔린 시점은 한 주 정도 전인데, 서지 상 인쇄일은 12/3, 출간일은 12/10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여러 서점에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기준일이 11월 말이고 올해 후보로 들어가 봤자 책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을테니 내년을 기약하자는 등 사유일지도.


2. 계약할 때 약간 껄끄러웠던 내용이 있다. 계약 후 2~3주까지 1장 원고만 납품하면 나머지는 계약종료일에 제출하면 되는 보통 계약과 달리, 이번 출판사는 출간일정이 빡빡하다며 장별 납품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한 장을 한 주마다 납품해야 하나 하고 걱정했다가, 결국 납품 1.5개월 전부터 3주마다 1/3 정도씩 납품하는 일정으로 정했다. 그렇다고 두 번째, 세 번째 납품할 때 그 전 납품분을 검토하지 않고 손 놓는 것도 아니라서 작업량은 늘어나는 셈이고, 그만큼 작업량 부담은 더하다. 안 그래도 비트코인에 봉사하고 보은하는 마음가짐으로 지원한 상황에서, 저런 조건까지 부가했다면, 글쎄 그래도 지원했을지는 모르겠다.


3. 그리하여 납품을 끝내고 나서는 '기한이 빠듯해서 납품 조건도 신경을 썼으니, 출간은 빠르겠지?' 하며 기다렸는데, 결국 완역 원고 납품 4개월이 넘어 나왔으니 평균 또는 그보다 약간 오래 걸린 축에 든다. 여기서 또 망상인데, 다시 관심이 집중될 때 바람을 타려고 비트코인 시세 오르는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고 상상해 본다. (그렇다면 결국 최적의 타이밍 잡기는 그다시 성공하지 못한 셈이다)


4. 저자에게 내용과 표현의 속뜻을 물어본 책으로는 세 번째, 활발하게 의견을 교환한 책으로는 두 번째, 그 중 출간된 책으로는 첫 번째다. (답장 안 온 1권은 출간도 취소되었다. 이 말 하면 모두 궁금해 하여 남겨 두는데, 원고료는 받았다.) 저자는 자기 책이 처음 번역되었는지 (하긴 첫 저서기도 하고) 한국어판은 언제 나오느냐, 한국어본을 구하고 싶은데 출판사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느냐 등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메일 교환하면서 한국어 제목을 다시 번역하여 알려주었는데, 별 의견은 없는 듯하다. 내 생각에 원제만큼 함축적이지 않지만, 한국어로 직역해서는 감흥이 덜할 원제보다 차라리 자극적이기라도 한 (그리고 핵심 메시지와 맥이 분명히 닿는) 번역 제목도 괜찮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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