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준비를 하던 시절, 강사가 학원 수업 시간에 이런 얘기를 했다. “왜, 독서실에서 공부 하다 보면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하는 때가 있지 않니? 빈도로 따지자면... 일년에 한 번 정도?”
외서도 그렇다. 한국어 책이라면, 설령 학술서라도 관심있는 주제를 명확히 다뤘을 경우 초반 적응기만 잘 버티면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반면 어쩔 수 없는 단일 모국어 구사자인 내게 외서 독서는 일종의 ‘업적’이자 고행이라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마치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처럼 읽은 분량과 남은 분량을 끊임없이 의식해 가며, ‘괴롭지만 어쨌든 포기하기 전에 한 발 더 딛어 보는’ 마음가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예외라고 하면 (만으로) 38년 평생 두 권이나 있었을까. 군 시절 영어공부나 할까 하고 사서 당직을 서던 날 저녁에 펼쳤다가 단숨에 읽었던 <Angels & Demons>(그렇다, 댄 브라운 소설이다)가 그랬고, 대학 영어수업 교재에 실린 단편이 흥미로워 회계법인 시절 샀던 로알드 달의 <Tales of the Unexpected>가 그랬다. 특히 <Tales>는 읽으면 읽을수록 남은 페이지가 줄어들어 안타깝기까지 한 신비체험을 할 정도였고.
그리고 요즘 세 번째 예외를 만났다. 지난 연말 해외여행에 가져가려고 샀다가, 감기가 드는 바람에 가족들이 수영하는 동안 풀사이드에 누워 읽기 시작한 책이 존 르카레의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다. 적도 근처 리조트에서 냉전기 첩보소설을 읽고 있으려니 분위기도 맞지 않고 (그러고 보면 같은 장소에서 바로 앞에 읽은 책은 한강의 <흰>이다. 장소가 안 어울리기로는 <Spy>보다 더하고, 흥미롭기는 못지 않았다) 감정이입도 잘 안 되어, ‘세 시간 동안 먼 산 아니 먼 바다 바라보기보단 낫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그리고 중반을 넘어갈 무렵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는데, 돌아오는 내내 페이퍼백에 몸을 기울이고 독서를 끝냈다. 혹시 다 읽기 전에 도착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과정, 반전, 결말에 현실 비판 모두 업계 경험자이기에 설득력을 더할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르카레 옹의 작품은 첫 작품부터 다 읽을 생각으로 2주 전에 bookdepository에서 일단 세 권을 주문했다. 그리고 <Tinker Tailor Soldier Spy> 영화를 올해 안에 봐야겠다. 후속작이 개봉하기 전에 원작을 (출간 순서에 맞춰) 읽고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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