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1년 1번역을 실천하듯 2019년도 반이 넘어간 시점에서 <달러는 왜 비트코인을 싫어하는가> 출간 이후 1년만에 나온 책이지만, 이미 썼듯 사실은 납품한 지 2년도 넘은 시점에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출간되었다. 누군가에게 책을 줘야 하는 타이밍에 도저히 맞추지 못할 것 같아 결국 증정본이 오기 전에 내 돈 내고 오프라인 서점에서 사서 전달했는데, 또 납품에서 출간까지 걸린 시간에 비하면 번개같이 증정본이 도착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권은 안 사도 됐을텐데) 심지어 여름 여행으로 집을 며칠 비우게 된 첫날에 집 앞에 도착할 정도로. (아예 선택지가 없었으면 모르겠지만, 택배기사에게 남길 메시지를 선택할 수 있대서 '경비실에 맡겨주세요'를 눌렀건만 여행에서 돌아온 나를 (예상을 뒤엎지 않고) 문앞에서 고이 기다리고 있던 총 3,600페이지짜리 택배상자...)

 

옮긴이의 말에 썼듯 '원서는 훌륭했다'는 말은 자신있게 할 수 있고, 최소한 '긴가민가하면서 그냥 뭉개버린' 구절은 없다는 말까지도 할 수 있다. 물론 이 말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므로 내가 '이 책에는 오역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오역일 것 같은데 저자에게 확인하지 않고 가슴에 묻은' 부분은 없다는 말이고, 오역일 가능성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은 자신있게 넘어갔으리라는 말이다. 다시 럼스펠드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명언을 반복하자면, 'known unknown'은 최소한 저자에게 물어보기는 했을지언정 'unknown unknown'은 그냥 unknown인 채로 묻혔을 것이다. (이거 옮긴이의 말 초안에 넣었다가 1. 욕을 먹든가 2. 어차피 편집자가 고칠 것 같아서 (이미 '전문직의 미래'에서 경험한 일) 알아서 뺐다)

 

다만 옮긴이의 말 관련하여 여기에만 기록을 남겨놓는다. 본문도 그렇지만, 옮긴이의 말이라면 출판 전에 절차상으로나마 (즉, 옮긴이의 의견을 반영하든 하지 않든) 번역자에게 확인은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 '이게 웬일인가!' 같은 표현은 내가 쓴 것이 아니고 (나는 훨씬 심심하게 쓴다), 또 내가 제출한 안에서는 문장을 존대말로 썼다. 다시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편집자나 독자가 보기에는 교정본이 결과적으로 옳을 수 있다. 다만, 비록 주석과 그림 출처조차 모두 끝난, 정말 책의 마지막 부분에 세 쪽으로 들어가는 하찮은 옮긴이의 말이라 해도 최소한 찍혀 나오기 전에 보여주기나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어쨌든 책은 잘 나왔고, 가격에 비하면 생각보다 잘 팔리는 듯하며, 게다가 출판사 이름 역시 (무게감으로 먹고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이 아니라 (무게감은 덜한 대신 팔림성은 더해 보이는) '지식의날개'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마동팔 검사의 극대노를 불러일으킬) 표현대로, 번역자는 싫어도 원저자는 싫어하지 않는 정신으로 집안에 한 권 들여놓으면 특유의 두께 덕분에 빙하시대에 땔감으로 써도 얇아빠진 보통 책보다 며칠은 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고 목침으로도 훌륭하며 웬만한 총알도 막아줄 가정의 필수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소하게는, '남해 거품 사건' 같이 웬만한 금융사 책에서는 첫머리에 나오지만 사실 엊그제 일어난 일부터가 아니라 (그리고 로마제국은 그제 쯤 멸망했음), 뜬금없이 쐐기문자부터 나와버리고 춘추전국시대 관자를 들먹이는, 금융을 빙자하여 인류 역사를 조망해버리는 터무니없는 스케일도 즐겨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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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점에 깔린 시점은 한 주 정도 전인데, 서지 상 인쇄일은 12/3, 출간일은 12/10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여러 서점에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기준일이 11월 말이고 올해 후보로 들어가 봤자 책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을테니 내년을 기약하자는 등 사유일지도.


2. 계약할 때 약간 껄끄러웠던 내용이 있다. 계약 후 2~3주까지 1장 원고만 납품하면 나머지는 계약종료일에 제출하면 되는 보통 계약과 달리, 이번 출판사는 출간일정이 빡빡하다며 장별 납품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한 장을 한 주마다 납품해야 하나 하고 걱정했다가, 결국 납품 1.5개월 전부터 3주마다 1/3 정도씩 납품하는 일정으로 정했다. 그렇다고 두 번째, 세 번째 납품할 때 그 전 납품분을 검토하지 않고 손 놓는 것도 아니라서 작업량은 늘어나는 셈이고, 그만큼 작업량 부담은 더하다. 안 그래도 비트코인에 봉사하고 보은하는 마음가짐으로 지원한 상황에서, 저런 조건까지 부가했다면, 글쎄 그래도 지원했을지는 모르겠다.


3. 그리하여 납품을 끝내고 나서는 '기한이 빠듯해서 납품 조건도 신경을 썼으니, 출간은 빠르겠지?' 하며 기다렸는데, 결국 완역 원고 납품 4개월이 넘어 나왔으니 평균 또는 그보다 약간 오래 걸린 축에 든다. 여기서 또 망상인데, 다시 관심이 집중될 때 바람을 타려고 비트코인 시세 오르는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고 상상해 본다. (그렇다면 결국 최적의 타이밍 잡기는 그다시 성공하지 못한 셈이다)


4. 저자에게 내용과 표현의 속뜻을 물어본 책으로는 세 번째, 활발하게 의견을 교환한 책으로는 두 번째, 그 중 출간된 책으로는 첫 번째다. (답장 안 온 1권은 출간도 취소되었다. 이 말 하면 모두 궁금해 하여 남겨 두는데, 원고료는 받았다.) 저자는 자기 책이 처음 번역되었는지 (하긴 첫 저서기도 하고) 한국어판은 언제 나오느냐, 한국어본을 구하고 싶은데 출판사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느냐 등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메일 교환하면서 한국어 제목을 다시 번역하여 알려주었는데, 별 의견은 없는 듯하다. 내 생각에 원제만큼 함축적이지 않지만, 한국어로 직역해서는 감흥이 덜할 원제보다 차라리 자극적이기라도 한 (그리고 핵심 메시지와 맥이 분명히 닿는) 번역 제목도 괜찮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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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6월 말 이후 오랜만에 샘플 작업 중이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비록 정식 번역 작업은 아니지만 충실감을 느껴본다. 방향을 어디로 잡고 무엇을 하든 매일매일 몸만 열심히 움직이면 제대로 사는 거라는 맹목적 근면 지상주의의 혐의가 엿보이기는 한다. 어쨌든 표면적으로 내세울 만한 근거는, 원래 그래서는 안 되지만 무산노동자로서 자투리가 될 수밖에 없는 시간을 그나마 유용하게 - 독서와 어학학습, 그리고 (샘플의 경우 선정된다면) 시간 환금까지 동시에 달성하는 방식으로 - 보내는 방법이라는 데 있다. 지난 3년을 통틀어 몸은 가장 분주하고 마음은 가장 번잡했던 4개월을 보냈지만, 돌이켜 보면 역시 '하려면 못 할 것은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해야 했느냐'고 물어본다면, '하는 이상으로 가치있게 보냈다'고 말할 수 있어 다행이기도 하다.


이렇게 새 책에 착수할 지도 모르는 상태인데, 전공이 딱 들어맞지는 않는 이번 샘플에 덜컥 지원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주 전에 받은 연락이다. <Txt me>를 납품받은 출판사가 검토 결과 출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기획서와 완역 원고 내용이 달라서라고 한다. 선인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게 지급한 비용, 담당자가 소비한 직간접 및 시간 상 기회비용 등을 고려하면 정말 예기치 못한 결론이다. 게다가 번역자로서 말하건대 이 책은 마케팅 전문가가 말하는 스마트폰의 사회적 영향력을 여러 각도에서 흥미롭게 다룬 양서다. 기획 당시 생각했던 것보다 내용이 너무 깊었는지 아니면 너무 얕았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한계이익조차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으니 출간을 접었을텐데, 번역료는 받았으니 금전적으로야 아쉬울 것 없고 그저, 죽어서 이젠 없지만 출판사 컴퓨터 안에서는 살아가는 한국어 번역본의 첫 독자로서 아쉬울 뿐이다.


그리하여 내 '인생의 무게 下' (내 경우에는 기납품 미출간이며 향후 출간 전망도 굉장히 낮다고 판단하는 원고) 목록은 <Modernist Cuisine (중 극히 일부)>, <Smart Growth>, <Txt Me> 등 셋으로 늘었다. 그 중에도 <Txt Me>는 실종(사망 추정)이 아닌 사망 확정으로서 최초 타이틀을 가져갔다. 최초의 계약, 최초의 단독 계약, 최초의 지명 계약, 최초의 인세 제안... 그리고 최초의 출간 불발 확정까지. 최초는 계속된다. 어떤 최초일지 예상하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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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초이스>가 최초의 계약, <공유경제는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가>가 최초의 단독 계약이었다면 <전문직의 미래>는 최초의 '동일 출판사 두 번째 계약'이자 옮긴이로서 최초로 글을 남긴 책이다. 바른번역에서 '출판사가 역자 서문을 원하는데 원하는 분량은 A4 2/3장 정도로 적지만 기일도 이틀밖에 없다'는 말에 잠시 고민했지만, 뭐 생명이나 생계에 지장이 없다면 지르는 게 답이라는 정신에 따라 하자고 마음먹고 출판사 담당자(고혜림 과장)와 통화를 했다. 애초에는 계획이 없던 일이지만 (그러니 서문 제출 후 1주일만에 초판이 서점에 깔렸던 것이다) 내용이 딱딱하기도 하거니와 저자는 '요즘 이슈가 된 4차 산업혁명'을 전혀 언급하지 않아, 보통은 역자가 글을 쓴다 해도 후기 형식으로 들어가는 것을 이번에는 발제처럼 가볍게 내용과 의의를 짚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였다.


<공유경제> 한국어판 제목과 <심플, 결정의 조건> 마케팅을 보고 느꼈던 일이지만, 확실히 출판사는 상품을 만들어 낼 줄 안다. 원서에서 제목은 고사하고 내용에도 일언반구 없던 '4차 산업혁명'을 제목에 붙인 감각도 그러하거니와 (물론 번역한 내가 보기에는 타당하다) 옮긴이 후기가 아닌 서문을 붙인 것도 독자가 대략 흐름을 잡아 대비한 후 결코 쉽지만은 않은 책 내용으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었던 듯하다.


다만 옮긴이로서 안타까운 점 하나를 꼽자면... 12월 초에 출간된 책 증정본을 아직도 받지 못했다. 2주만에 2쇄를 찍어낼 정도로 물량이 부족한 것이 첫째, 그리고 출판사 담당자가 다른 책 마감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바빴던 것이 둘째 이유다. 출판사마저 이 책이 이렇게 잘 나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나 역시, 내가 번역한 책이 다 그랬듯 참 훌륭한 책이라서 옮길 때 나 자신은 즐거웠지만 독자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확신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는 책 판매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이나 (비록 원서의 내용은 훌륭했음을 내가 보증하지만) 매끄러운 문장 (비록 전문 교정자의 교정까지 잘 거쳤음을 나도 알고 있지만)보다는 사람의 눈길을 끌고 놔주지 않는 제목이 아닐까 하고 의심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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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작업 중에도 관련한 글을 남겨, 책 내용을 다시 다룰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다.

다만 책을 둘러싼 얘기만 남긴다.


1. 회사를 다니면서 번역까지 하기가 만만치는 않다. 내게 번역이란 부업이라기보다는 취미에 가깝기 때문에 마음이 괴롭지는 않은데 몸은 어쨌든 힘들다. 한 권을 번역하는 기간 중에서도 가장 힘든 시기는 첫 한 달이다. 두 달이 기일이라면 첫 달에 초고 완성, 다음 보름 동안 컴퓨터에서 1차 교정, 다음 1주일 정도 책과 거리를 둔 후 인쇄하여 1주일 동안 2차 교정하는 일정을 기본으로 하는데, 보통 일정을 두 달 반에서 석 달은 받으려 하기 때문에 꼭 첫 달에 초고를 마치지 않아도 여유는 있는 편이다. 하지만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입장에서 초반에 그런 여유를 갖기는 힘들어, 첫 두 권을 번역할 때는 초고 완성 후 꼬박꼬박 1주일 정도 감기몸살을 앓았다.

반면 이번에는 분량이 그 전 책에 비하여 반에서 2/3정도 되었고, 일정도 석 달로 시작했다. 초고 완성을 3주에 마치고 (마친 날 '어? 벌써 끝났나?' 하는 당혹감이 지금도 생각난다) 1차 교정까지 마친 후 한 달 동안 라즈베리파이 RC 자동차 연구와 중국어 공부에 매진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마감 15일 후 시작한 다음 프로젝트에서 제대로 반작용이 오게 되는데...


2. 미국에 유학 간 친구에게 <심플, 결정의 원칙>과 이 책 증정본을 한 권씩 보냈다. 공짜로 주는 것이니 미국 독자에게 열심히 홍보하라고 과제를 냈더니 국회의사당, IMF, 미술관 앞에서 책을 읽는 시늉을 하며 인증사진을 찍어 보냈다. 애초에 그런 곳 앞에 '서서' 책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므로 홍보효과는 뛰어났다고 믿고 싶다.  (왜 한국어 번역본을 미국 독자에게 홍보하는지는 접어두자)


3. 책을 한 반쯤 번역하던 중, 얼마 후 있던 국회의원 선거를 생각하며 '선거 전에 출간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 대선도 있고 국회의원 선거도 또 있을 것이며 보편배당(시민배당) 의제는 앞으로도 계속 논쟁 대상이 될 것이니 짧게 볼 필요는 없겠지만, 책도 신선도를 무시할 수 없는 상품이고, 또 좋은 책은 많이 팔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4. 이번 책은 출판사에서 바른번역에 리뷰어 모집을 의뢰했다. 16명인가를 모집했는데, 내가 여태 온라인서점에서 확인한 리뷰는 6개다. 마감과 계약 엄수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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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서와 자기계발서는 지금까지 구분되었지만, 인식은 점차 바뀌고 있다. 한 기사에서는 실용적 지식을 전달하는 경제/경영서는 사실상 자기계발서와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이 두 가지를 합한 서적이 연간 출판물 중 40% 정도를 차지하여 출판계에서 '사실상' 자기계발서의 비중이 매우 크다고 썼다.

대충 맞는 말이다. 독자가 스스로 한 번 걸러 규칙을 만들어 낼 필요 없이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를 제시한다는 데서 자기계발서와 경영서 대부분은 같다. 나도 (이렇게 말하면 자폭이지만) 수많은 샘플과 리뷰를 쓰면서 느낀 것이다. 다만 '대충' 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할 것이, '경제'서와 '경영'서는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와 '경영'이라는 단어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바꿔도 무방하다. 어쨌든 '공유경제는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가'를 자기계발서와 동류로 보기는 힘들다. 그 책은 경제 또는 경영 현상을 분석하여 제시할 뿐, '그렇다면 독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직접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독자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를 제시한다 해도, 그 행동이 기업 경영 수준에나 적용되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자기계발서와 동류로 묶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짐 콜린스 책은 가정 주부, 나 같은 월급쟁이 회사원, 취업 준비생이 아니라 기업 경영자나 임원, 최소한 기획부서원 정도에게나 유용한 지침을 준다는 점에서 자기계발서와는 다른 경영서로 봐야 한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내 번역 이력상 최초의 '자기계발서類(또는 流)' 경영서다. 실제로 대면한 번역 은사 두 분 중 한 분이 자기에게 자기계발서 번역 의뢰가 들어올 때마다 '자기계발서 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배부른 투정을 부리셨다고 하는데, 나는 그 심정 이해한다. 제목은 잘 뽑아놨지만 읽어보면 하나마나한 뻔한 소리 나열에 그치는 양산형 자기계발서가 수도 없는데, 나처럼 이거 해서 돈도 벌긴 하지만 아직은 책 읽고 글 쓰기가 좋아서 취미로 하는 사람이 두세달 동안 그런 책이나 보고 있어야 한다면 순식간에 취미가 노동으로 둔갑하게 된다. 이 책은 취미로 번역할 수 있었다는 데서 운이 좋았다. (내가 아직 번역할 책을 고를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않으니.) 

'모든 경우를 생각하고 대비하라' 같이 윗사람이라면 할 만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기는 불가능한, 그래서 면피용 발언밖에는 안 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현실에 맞춰 대응하라는 주제가 일단 마음에 든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가 다양하고 색다르다는 점도 좋다. 이 책 작업 시작한 시점이 아직 더울 때였는데, 참고문헌 중 하나인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읽으면서 몰입하다보니 잠시나마 서늘함마저 느꼈던 기억이 난다. 도쿄 통근철도망 설계에 점균을 활용했다는 사실도 옮기면서 뇌리에 박혔다. (이 부분을 옮길 때 장소와 시간 모두 기억나지만 여기에는 여백이 부족하여 쓸 수 없다.)

무엇보다도 가벼운 자기계발서라면 '규칙은 단순하게 만들어라'정도로 넘어갈 내용에 관하여, '단순한 규칙'의 생성 과정과 피드백을 중요하게 다룬 부분이 이 책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규칙은 사무실에 몇 시간 틀어박혀 고심한 끝에 '이거다!'하며 십계처럼 들고 나오는 절대불변의 규칙이 아니다. 과거 자료를 수집하고 (또는 이 기회에 생성해 보고) 분석하여 정제한 끝에 나오는, 현실을 관통하는 핵심이며, 또한 도출한 후에도 검증을 거쳐 수정될 수 있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중요한 부분이 이동하면 폐기될 수 있는, 무거우면서도 가벼운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 주제를 '규칙을 간단히 만들어라'라고 요약한다면 이는 오독의 산물이거나, 최소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발언이다. 단순한 규칙은 절대 간단히 나오지 않는다. 단순한 규칙은 복잡한 규칙보다 적용하기 쉬울지 몰라도, 만들기는 훨씬 어렵다. 하지만 그것을 해 내면, 산이라도 옮길 수 있다. 해 낼 가치가 충분한 것이다. (역시 '번역은 번역가에게, 마케팅은 출판사에게'다. 저자도 아닌 잡스가 남긴 말을 마케팅 카피로 사용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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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mple Rules>에 착수하여 한참 1차 작업중에 접어든 지 3주 (<포브스> 작업이 있었으니 사실상 2주),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이코노미스트> 번역 건'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상세조건은 들을 필요도 없었지만 일단 작업량과 기한을 말씀해 주시니 생각하는 척을 1초간 하고 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이코노미스트>를 번역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이코노미스트에서 발행하는 <World in 2016>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마지막으로 산 <World in ~>은 아마 2008년판이었던 듯하다. (책이 본가에 있어 정확하지는 않다) 민주당 경선에서 오바마가 선전하겠지만 결국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후보에 당선될 거라고 예측하던 부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뭐 이거야 인상깊을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 기억에 남지만, 그래도 한 해 일을 경제 뿐 아니라 정치, 과학, 문화 등 다각도에서 예측이라도 해 보는 책 중 대표를 달리 꼽기도 힘들 것이다.

나 같은 초보가 일을 골라가며 할 수는 없다. 무슨 책이든 무슨 글이든 맡겨주기만 하면 할테니 '무슨 분야를 번역하고 싶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조금 더 유의미한 질문을 하자면, '이미 번역 건이 진행중이거나 본업이 바빠서, 일을 더 맡는다면 밤을 새야 한다 해도 꼭 해보고 싶은 번역 일은 무엇이냐'고 물어야 한다. 답은 두 가지, <문명>과 <이코노미스트> 관련 번역이다. 

(2 시절부터 해 왔고 5 플레이타임이 1,000시간이 넘었으며 신작이 나오면 당연히 할 게임 문명에는 '백과사전'이 있다. 등장인물 대사 번역 개념이 아니라 토막지식 번역이다보니 게임번역이라기보다는 역사책 번역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내게 오퍼가 올 일은 없겠지만)

발주일로부터 납품일까지 3일밖에 되지 않는 촉박한 일정이 주어졌지만 분량 역시 기사 두 꼭지라 발주 당일 밤에 1차 작업을 완료했다. 다른 나라 정치 얘기라 몇 가지 찾아가며 번역해야 했지만 이 또한 번역의 매력이다. 

이리저리하여 납품을 끝내고 출간을 확인한 후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늦게서야 손에 넣은 책 표지만 보면 마치 이코노미스트가 한국어판도 낸 듯, 아니면 현대경제연구원이 번역을 한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바른번역 이름은 맨 뒤 서지에만 나와 있다. 이 외 나를 포함한 개별 번역가 이름은 없다. 

내가 일부만 참여한 책이라 자세하게 평을 하기는 껄끄럽다. 다만, 내가 책을 고를 때라면 번역가 이름이 앞에 걸려 있지 않거나, 개인이 아닌 단체가 번역자로 올라간 책은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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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품한 지 1년을 15일 남겨놓고 출간되었다.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최초로 맡은 책이다. 즉 '공역'->'단독번역'->'샘플 통과에 따른 단독번역'으로 이어지는 출판번역 테크 중 첫 번째인 것이다. 샘플로 따낸 것도, 단독 번역이 아닌데도 기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납품하고 1년이 다 되어 갈 때까지 (번역료는 받았지만) 출판이 되지 않아 '번역 퀄리티를 보고 출간 포기설'이 거의 굳어져 가던 어느 날 갑자기 출간이 되어 버린 요즘, 두 가지 의문점이 나타났다.

1. 제목은 왜 저렇게 지었을까? 이 책 원제는 <The Quest for Security>다. '보호를 찾아서' '안전을 찾는 여행' 아니면 친구 말대로 와우 공략집 같은 원제를 살려 '안보 퀘스트'라고 하기에는 어색하겠다. 하지만 원제와 아무 연관 없는 영문 음역을 제목으로 내세운 데는 당혹감이 든다. 내 가설은, 비용은 다 들였으니 출간은 해야겠는데 (역시나) 번역 퀄리티를 보고 스티글리츠가 "원서가 내 책이라는 흔적을 남기면 문제삼겠다"는, <위대한 탈출> 사태의 정반대 쯤 되는 클레임을 걸어 억지로 바꿨다는 것이다.

2. 표지 중앙에 떡하니 박힌 노란 피라미드와 눈은 뭘까? 역시 원서 표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책의 제목은 'Quest for Security' 또는 '더 초이스'지 '프리메이슨'이 아니다.


이런저런 내용을 차치하면, 딱딱하고 좋은 책이다. 이 책을 번역하지 않았다면 내가 언제 무슨 계기로 기후 변화나 글로벌 거버넌스, 도시화의 의의와 영향에 대하여 생각해 봤겠는가? 시장경제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려면 우선 외부성을 시장 안으로 포괄해야 한다. 친환경 공법, 친환경 소재를 사용한 제품이 비싼 것은 싼 제품이 유발하는 공해의 비용이 시장에서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개인이나 기업 수준 뿐 아니라 일개 국가 수준에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시장경제 요소를 지닌 경제는 경쟁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결국 전 세계 국가가 의견을 조율하는 글로벌 거버넌스 형태가 중요한데, 모든 나라가 동일한 발언권을 얻기는 힘들고, 또한 G7/G20을 위시한 소수 강국이 주도하는 체제로는 이 외 국가의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오래 전부터 굉장히 익숙할 이런 주제를 나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깊이 접하게 되었다. 공부하면서 돈도 받는 번역 일을 내가 실질적으로 시작하게 된 뜻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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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1. 수주 경위

10.13 09:00 <Simple Rules> 샘플 제출 마감기한이었으며, 당연히 그 전날 밤에 전송 완료했다.

10.13 11:02, 바른번역에서 온 전화(였으나 샘플 마감기한 이후 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역시나 샘플 관련은 아니었고, 포브스코리아에서 급하게 (기한이 3일 후인 16일 정오까지였다) 10페이지 짜리 기사 번역을 의뢰했는데 가능한지 문의 내용이었다. 일단 기사를 보내주면 바로 확인하고 가능여부를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원고를 받아 분량을 보니 아니 내가 전업번역가도 아니고 안되겠다 싶어 메일 받은 지 20분 만에 안되겠다 죄송하다 답을 보냈다.

10.13 14:00 바른번역에서 오늘만 두 번째 온 전화. <Simple Rules> 번역가로 선정되었다는 전화였다. 출판사는 과연 내 샘플을 읽어보기는 한 것인가 의심이 드는 동시에, 제대로 안 읽어보고 선정했다면 안 읽어봐 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바른번역 이지은 팀장님은 출판사에서 12월 말까지 제출 원했으나 협상하여 1월 4일까지로 연기했다고 했다. 그 정도라면 마감날짜 늦춰지는 데 싫어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 때는 그렇게 끔찍한 결과가 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10.13 16:09 바른번역에서 메일이 옴. 포브스코리아 혹시 마감기한을 일요일 정오까지 하면 어떻겠냐는 내용. <Simple Rules> 마감기한이 연장된 것은 복선이었나 하는 즐거운 배신감이 들었으나 (물론 기분 나쁠 이유는 전혀 없다. 바른번역의 얇은 인력풀(풍부한 인력을 더 풍부한 일감이 압도하는)에게 감사하자) 마침 토요일이 첫째 어린이집 운동회 날이다. (이것이 내가 말한 가족행사의 정체다) 사양할 명분도 이유도 없는 듯 하여 '일요일 밤까지 하면 안 될지', 그리고 '안 된다고 하면 그냥 일요일 정오까지 하겠다'고 답장했다. 밤 새지 뭐.

10.13 16:13 바른번역에서 답장. 월요일 9시까지로 마감기한을 연장했다고 하심.

이렇게 다른 번역건까지 볼모로 잡힌 다사다난한 수주 경과를 거쳤다. 


2. 원어 병기

아시아 부자 가문 얘기다 보니 중국 인명이 많이 나온다. 문제는 병기명을 어떻게 할 것이냐인데, 예를 들어 李嘉誠을 이가성(한국 독음)이라 하느냐 리자청(보통화 발음 음역)이라 하느냐 리카싱(출신 지방 병음이 기초라고 추정되는 영어 표기명 재음역)이라 하느냐 문제다. 

출판사에 옵션 중 하나로 제시하기는 했으나 한국 독음은 애초에 답이 아닐 듯 했고, 보통화 발음은 발음 근거 찾기가 편하기는 하나(시험 통과용으로 공부하여 합격한 HSK 6급은 이 부분에서 이미 시간과 노력과 돈 값을 했다) 내 이름을 웨이다셴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영어 표기명 재음역은 광동화 등에 무지한 내 한계상 내 이름이 위대선인지 위다이선인지 위대순인지 위다이순인지 헷갈리기도 하려니와 한국인에게 어색할 듯 했다. (郭芳楓을 보통화대로 궈팡펑이라 읽는 편이 그래도 퀙홍픙(Kwek Hong Png)이라고 읽는 편보다는 덜 어색하지 않겠는가)

출판사에서는 단박에 보통화대로 해달라고 답이 왔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래서 일이 쉬워지지 않은 것이, 원문 인명은 출신지역 영어 표기명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홍콩/싱가포르에서 흔히 그렇듯 중국 인명이 아니라 '레이먼드', '에반' 같은 영어이름만 나온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보통화대로 하겠다고 한 이상 오기가 생긴 나는 모든 중국인명의 원어명(중국어)을 병기하기로 했다. 두 가지만 말한다면, (1) 원 중국인명을 찾기에는 구글보다 바이두가 좋았다. (2) 번역에 들인 총 시간 중 아마 반은 이 중국어명 찾는 데 소요되었을 것이다. Kwek Eik Sheng이 郭益升라는 사실은 원고 제출 9시간(수면/출근 시간 등 제외하면 사실상 마감시간)에서야 알아냈다. 곽익승 XXX...

그리고 이 전설이 슬픈 이유는 바로... 출간된 결과물에는 원어병기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데 있다. 특히 영어이름만 있는 사람은 그냥 영어이름만 표기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 됐어는 무슨 최선은 언제나 다하는 거고 과다노력을 했다는 게 결국 시간을 아끼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단 얘기다.


3. 제목

line으로 라임을 맞춘 것이 확연이 보이는데 '혈통과 이익' 따위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유의어대사전으로 2단계인가 3단계까지 들어가서야 두운을 찾아냈지만 이 정도로도 부족하지 않나 하던 차에 (1) 안기순 선생님은 '제목은 출판사가 정하는 거니까 안 해도 된다' (왜곡된 기억이라면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러나 왜곡되었다면 바로 왜곡되었기 때문에 제게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2) 그러니까 출판사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거야 하는 마음으로 그냥 넘겼다. 그리고 출판사는 이걸 그대로 썼다. 내가 제출한 안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서였다고 믿겠다.


4. 번역자명

잡지의 특성을 몰랐던 나는 기사에서 역자명을 찾았지만 없었다. 내 이름은 잡지 서지 부분에 다른 번역가 두 명 이름 뒤에 마지막으로 붙어 있다. 글자 크기는 한 5포인트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종합하면 모든 번역 건이 그렇듯 내용으로도 피와 살이 되고 금전적으로도 당연히 보탬이 되며 얘기거리로마저 한 획을 그은 즐거운 작업이었다.

Posted by TUNC AU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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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한 책 중 처음으로 출간된 책이다. 단독 번역된 책으로는 <Smart Growth> 이후 두 번째, 이름이 올라갈 역저로는 <Quest for Security> 이후 세 번째, 전체 역저로는 <Modernist Cuisine> 이후 네 번째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나머지 세 권은 대체 왜 안 나올까? 번역료는 받았으니 상관 없다면 없는 일이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걸린다. 물론 그렇다고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하여 받은 돈을 돌려줄 의향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간단한 감상을 말하자면, 현역 기업가이기에 '공유'라는 단어가 주는 일견 긍정적 편견에서 벗어나 공유경제를 개인/기업/정부 등 여러 각도에서 현실 그대로 분석했다는 데서 차별되는 책이다. 내가 번역했던 책이 모두 그랬듯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기보다는 좋은 책만 만났던 행운 덕분이라고 치자) 사물이나 개념을 새롭고도 균형잡힌 각도에서 보는 좋은 책이다.


추가 1. 나 같이 미천한 번역가에게는 증정본이 없는 줄 알고 YES24에서 신간 확인을 하자마자 일단 세 권을 사 하나는 소장하고, 나머지는 각각 그 다음 주 만날 약속이 있던 부모님과 동생 내외에게 전했다. 그 후 10.29일에 바른번역에서 증정본 세 권을 보내준다는 말을 들었다. 장인어른+장모님, 두 처남 내외에게 전할 예정이다.

추가 2. YES24에는 10.19 출간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그리고 그 때부터 실제 주문도 가능했다) 교보문고에는 11.5 출간으로 나온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Posted by TUNC AU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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