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말에 가족과 함께 괌에 다녀왔다. 9월부터 시작한 Money Changes Everything 초고를 여행 이틀 전에 마쳐, 깔끔하게 일거리를 놓고 가게 되어 마음이 편했다. 하긴 마음이 편하지 않아봤자 가족여행에서 내(그리고 나와 같은 아빠) 역할이 어떤 것인지 안다면 어차피 큰 성과를 낼 수는 없지만.
이틀째인가, 해변에 나갔다 오니 바른번역에서 부재 중 전화가 와 있었다. 지금 하는 일 데드라인이 석달이나 남았으니 샘플 의뢰는 아닐텐데 대체 뭔가 하며 전화를 걸어보니 새 책 의뢰였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의뢰한 일정이 3월 말까지. 원하는 일정을 말해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3월 말부터 착수할 만한 여유는 없다 했다. 최소 5월말까지는 있어야 할 것 같다 하고, 일단 초안을 번역해 보았다. 빅데이터로 대표되는 통계 방식과 정확도 향상이 사회에 끼칠만한 위험을 다루어보는 책인데 전개방식으로 보나 주제로 보나 딱 내가 맡을 만한 책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일정이 도저히 맞지 않아 공개 모집을 통해 다른 분이 맡게 되었다. 초안이나마 2장까지 휙휙 진행해 보았고 그러다보니 4월말까지는 못할 것도 없겠다 생각이 들어 아쉬웠지만, 외관상 평판이나 개인 일정 및 건강을 생각하면 실망할 일은 아니다.
그러고 한 주였나, 같은 출판사에서 바른번역을 통해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다른 책으로 5월말까지, 그리고 필요시 일정 조정 가능하다는 조건이었다. 파일을 휙 넘겨보니 대충 핸드폰 얘기인 듯한데.. 내 성향이나 커리어를 생각하면 딱 맞아떨어지는 듯하지는 않아 지난 번 책을 놓친 것이 더욱 아쉬워지기는 했다. 그래도 같은 출판사에서 뭘 그렇게까지 잘 봐주었나 하는 고마움이 들어 마음에 드는 책이라고 반쯤 영혼을 섞어 답했다. 일정은 6월 중순까지. 그 <Txt Me>를 어제 화면상 교정(그러니 1교)까지 마쳤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정리하면, 마케팅 업계에서 모바일/디지털 추세를 몸소 체험하고 여기에 올라타 나름대로의 업적을 쌓은 유명 경영계 인사가 쓴 스마트폰 찬가다. 이제 안경이나 속옷과 다를 바 없이 확장된 신체 또는 부속지가 된 스마트폰을 주제로 한다면 보통은 스마트폰의 해악이나 최소한 주의할 점을 중심에 깔면서, 유통업 등 스마트폰이 충격을 가져온 분야 같이 비교적 중립적인 지역까지 다루지 않을까? 집중력 저하, 인간관계 단절, 언어 파괴 등을 소재로 삼아서. 그런데 저자 보닌 버(Bonin Bough)가 보는 스마트폰이란, 일단 경영 부문에서만 보아도 유통업 파괴자 역할에서 그치지 않고 음악 산업의 새로운 구세주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음악 불법복제는 데스크탑 시대의 유물이지, 차라리 스트리밍 결제가 속 편한 스마트폰 시대까지 이어질 해악은 아니라는 것이다. 언어 파괴? 스마트폰과 인터넷 시대에 언어가 파괴된다 해도, 언어가 인터넷에서 더 많이 쓰이기 때문에 더 많이 파괴될 뿐이다. 심지어 포르노그래피조차도 '새로운 성교육'이라는 제목 아래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역할마저 했다는 식으로 다룬다. 스마트폰 읽기에 따른 독해능력 저하 정도야, 새로운 매체의 도입에 따른 그야말로 'side' effect 정도로 넘겨버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든 여건이 동일할 때 놓친 책과 이 책을 놓고 고르라 했다면 나는 십중 십 놓친 책을 골랐을 것이다. 주제, 전개방식, 커리어, 주 관심사를 볼 때 놓친 책은 모든 면에서 나와 그야말로 딱 맞는 책이다. 마치 만나기 전에 나열한 이상형의 조건이 모두 충족되는 상대처럼. 하지만 (이번 책을 번역하며 참고한 <모던 러브>에서 명확하게 든 반례에서 보았듯) 그런 조건이 '만나보니, 알고 보니' 이상적인 짝을 만나는 데 진정 기여할까? 초고를 마쳤을 때나 1교를 마친 지금이나 드는 생각인데, 나는 지난 책을 놓치고 이번 책을 맡게 된 행운에 감사한다. 반복하자면 주제, 전개방식, 커리어, 주 관심사 면에서 최선과 (지나치게 많이는 아니고) 약간씩 어긋나기에 그만큼 내게 적당한 책이었다. (미드에서라면 you complete me 내지는 it completes me 정도 표현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책 덕분에 내가 complete 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따지면 그 사람들도 사귀거나 결혼한다고 complete해 진 것은 아니니까)
하나만 더 기록한다. 저자 경력은 마케팅 분야다. 그런데 1장부터 10장까지 제목을 보며 짚어보면, 언어/육아/성/정치/기억/혁신 등 마케팅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분야까지도 꽤 흥미롭게 짚어낸다. 이처럼 다양한 근거는 일하면서 수집한 것일까? 아니면 본업과는 약간 거리를 둔 일종의 취미 또는 외도로 연구한 것일까? 업계 관계자용 전문 서적이 아니라 대중서를 쓴다면 이 정도 넓이와 깊이(소위 T형)는 갖추어야겠기에 드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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