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사전

기타 2019. 3. 10. 00:16

국민학생 쯤 부터였을까, 모르는 단어 뜻을 물으면 아버지는 "사전을 찾아 봐라."라고 말씀하셨다. "아니 내가 사전을 찾을 줄 몰라서 여쭤 본 것도 아니고..."라고 불만을 나누던 동생에게 깊이 공감하던 시절이었다. 지난 설 연휴 때 들은 일인데, 아버지와 터울이 꽤 지는 작은아버지 두 분도 어린 시절에 아버지께 단어 뜻을 물으면 그런 대답을 들으셨던 모양이다. 50년도 전에 들었을 (그리고 나와 동생이 그랬듯 몇 번 듣고는 다시 청하지 않았을 테니 그리 많이 반복하여 듣지도 않았을) 그런 대답이 '정말 듣기 싫은 말'이었다고 말씀하셨을 정도니까.


사실 동생이 불만을 나눴을 때 쯤이면, 나는 아버지께 묻지 않고 사전을 찾기 시작한 지 이미 2년이 되어 아버지가 왜 그렇게 대응하셨는지 어렴풋이나마 알았을 것이다. 정확한 뜻을 알려주기에는 사전보다 뛰어날 수 없을 것이고, 단어 공부나마 혼자 해결하는 습관을 들이는 데도 물고기를 달라고 하는 아이에게 잡을 방법을 알고 잡을 도구도 있으니 직접 잡으라고 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 


물론 당시 관점으로만 봐도, 아무 결점 없이 긍정할 일은 아니었다. 의도야 어쨌든, 내가 받을 수 있음을 당연히 아는 것을 거부당한 그 시점이 부모님께 거리감을 느낀 첫 기억이었다. '이제는 가능한 한 스스로 해결해야겠구나' 하는 자립심 또는 고립감. 자녀는 언제가 되었든 부모를 떠나게 되고 또 떠나야 하니 그 결점 역시 사실은 결점조차 아니라 할지라도.


아니, 정말 결점이 아닐까? 모르면 일단 책을 찾고 혼자 해결해 보려는 태도라면 최소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시험 점수를 잘 받는 데 유리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책을 찾고 공부하는 과정은 혼자 해야 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우선 잘 알 만한 사람에게 묻고, 잘 풀리면 아예 맡겨버리는 (그리고 그 만큼을 도와주는) 방법이 '혼자 하는' 방법보다 나은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아는 지금으로서는, 그런 '도움받고 도와주는'  방법에 저항감이 덜하고 또 능하게 되는 편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가 초등학교에서 5일을 보낸 후 처음 맞는 주말이었다. 첫째가 단어 뜻을 물으면 아직은 아는 한 친절히 대답하고 있다. 몇 달 전 사전 찾는 법을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사전으로 해결할 마음이 전혀 없는 듯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한 마디면 미흡하나마 바로 대답해 주는 생체사전이 바로 옆에 있는데. 하지만, 생체사전의 비루한 능력을 고려하면 사전을 우선 찾는 습관은 역시 중요하다. 한편, 나보다는 책에 덜 매달리고 사람에 더 의지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아빠, 공허가 뭐야?"라는 질문에 있는 지식 없는 지식 다 동원하여 "아, 공허란 빌 공 자에 빌 허 자를 쓰는 단어니까 텅 비었다는 뜻이야."라고 적극적으로 대답하거나 "이제 초등학생이니까 사전을 찾아 보렴"하고 냉정하게 대답하지 않고, "아빠는 잘 모르겠네? 사전을 찾아봐야겠는걸?"하고 따뜻한 (아니, 최소한 차갑지 않은) 소극적 방법을 사용하는 편이 어떨까 싶다. 그렇게 쓰고 나니, 40 평생 내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말 몰라서 모른다고 답한 것이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깨달음이 온다.

Posted by TUNC AU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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