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1년 1번역을 실천하듯 2019년도 반이 넘어간 시점에서 <달러는 왜 비트코인을 싫어하는가> 출간 이후 1년만에 나온 책이지만, 이미 썼듯 사실은 납품한 지 2년도 넘은 시점에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출간되었다. 누군가에게 책을 줘야 하는 타이밍에 도저히 맞추지 못할 것 같아 결국 증정본이 오기 전에 내 돈 내고 오프라인 서점에서 사서 전달했는데, 또 납품에서 출간까지 걸린 시간에 비하면 번개같이 증정본이 도착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권은 안 사도 됐을텐데) 심지어 여름 여행으로 집을 며칠 비우게 된 첫날에 집 앞에 도착할 정도로. (아예 선택지가 없었으면 모르겠지만, 택배기사에게 남길 메시지를 선택할 수 있대서 '경비실에 맡겨주세요'를 눌렀건만 여행에서 돌아온 나를 (예상을 뒤엎지 않고) 문앞에서 고이 기다리고 있던 총 3,600페이지짜리 택배상자...)

 

옮긴이의 말에 썼듯 '원서는 훌륭했다'는 말은 자신있게 할 수 있고, 최소한 '긴가민가하면서 그냥 뭉개버린' 구절은 없다는 말까지도 할 수 있다. 물론 이 말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므로 내가 '이 책에는 오역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오역일 것 같은데 저자에게 확인하지 않고 가슴에 묻은' 부분은 없다는 말이고, 오역일 가능성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은 자신있게 넘어갔으리라는 말이다. 다시 럼스펠드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명언을 반복하자면, 'known unknown'은 최소한 저자에게 물어보기는 했을지언정 'unknown unknown'은 그냥 unknown인 채로 묻혔을 것이다. (이거 옮긴이의 말 초안에 넣었다가 1. 욕을 먹든가 2. 어차피 편집자가 고칠 것 같아서 (이미 '전문직의 미래'에서 경험한 일) 알아서 뺐다)

 

다만 옮긴이의 말 관련하여 여기에만 기록을 남겨놓는다. 본문도 그렇지만, 옮긴이의 말이라면 출판 전에 절차상으로나마 (즉, 옮긴이의 의견을 반영하든 하지 않든) 번역자에게 확인은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 '이게 웬일인가!' 같은 표현은 내가 쓴 것이 아니고 (나는 훨씬 심심하게 쓴다), 또 내가 제출한 안에서는 문장을 존대말로 썼다. 다시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편집자나 독자가 보기에는 교정본이 결과적으로 옳을 수 있다. 다만, 비록 주석과 그림 출처조차 모두 끝난, 정말 책의 마지막 부분에 세 쪽으로 들어가는 하찮은 옮긴이의 말이라 해도 최소한 찍혀 나오기 전에 보여주기나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어쨌든 책은 잘 나왔고, 가격에 비하면 생각보다 잘 팔리는 듯하며, 게다가 출판사 이름 역시 (무게감으로 먹고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이 아니라 (무게감은 덜한 대신 팔림성은 더해 보이는) '지식의날개'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마동팔 검사의 극대노를 불러일으킬) 표현대로, 번역자는 싫어도 원저자는 싫어하지 않는 정신으로 집안에 한 권 들여놓으면 특유의 두께 덕분에 빙하시대에 땔감으로 써도 얇아빠진 보통 책보다 며칠은 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고 목침으로도 훌륭하며 웬만한 총알도 막아줄 가정의 필수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소하게는, '남해 거품 사건' 같이 웬만한 금융사 책에서는 첫머리에 나오지만 사실 엊그제 일어난 일부터가 아니라 (그리고 로마제국은 그제 쯤 멸망했음), 뜬금없이 쐐기문자부터 나와버리고 춘추전국시대 관자를 들먹이는, 금융을 빙자하여 인류 역사를 조망해버리는 터무니없는 스케일도 즐겨볼 만 하다.

Posted by TUNC AUTEM
,


1. 서점에 깔린 시점은 한 주 정도 전인데, 서지 상 인쇄일은 12/3, 출간일은 12/10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여러 서점에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기준일이 11월 말이고 올해 후보로 들어가 봤자 책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을테니 내년을 기약하자는 등 사유일지도.


2. 계약할 때 약간 껄끄러웠던 내용이 있다. 계약 후 2~3주까지 1장 원고만 납품하면 나머지는 계약종료일에 제출하면 되는 보통 계약과 달리, 이번 출판사는 출간일정이 빡빡하다며 장별 납품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한 장을 한 주마다 납품해야 하나 하고 걱정했다가, 결국 납품 1.5개월 전부터 3주마다 1/3 정도씩 납품하는 일정으로 정했다. 그렇다고 두 번째, 세 번째 납품할 때 그 전 납품분을 검토하지 않고 손 놓는 것도 아니라서 작업량은 늘어나는 셈이고, 그만큼 작업량 부담은 더하다. 안 그래도 비트코인에 봉사하고 보은하는 마음가짐으로 지원한 상황에서, 저런 조건까지 부가했다면, 글쎄 그래도 지원했을지는 모르겠다.


3. 그리하여 납품을 끝내고 나서는 '기한이 빠듯해서 납품 조건도 신경을 썼으니, 출간은 빠르겠지?' 하며 기다렸는데, 결국 완역 원고 납품 4개월이 넘어 나왔으니 평균 또는 그보다 약간 오래 걸린 축에 든다. 여기서 또 망상인데, 다시 관심이 집중될 때 바람을 타려고 비트코인 시세 오르는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고 상상해 본다. (그렇다면 결국 최적의 타이밍 잡기는 그다시 성공하지 못한 셈이다)


4. 저자에게 내용과 표현의 속뜻을 물어본 책으로는 세 번째, 활발하게 의견을 교환한 책으로는 두 번째, 그 중 출간된 책으로는 첫 번째다. (답장 안 온 1권은 출간도 취소되었다. 이 말 하면 모두 궁금해 하여 남겨 두는데, 원고료는 받았다.) 저자는 자기 책이 처음 번역되었는지 (하긴 첫 저서기도 하고) 한국어판은 언제 나오느냐, 한국어본을 구하고 싶은데 출판사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느냐 등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메일 교환하면서 한국어 제목을 다시 번역하여 알려주었는데, 별 의견은 없는 듯하다. 내 생각에 원제만큼 함축적이지 않지만, 한국어로 직역해서는 감흥이 덜할 원제보다 차라리 자극적이기라도 한 (그리고 핵심 메시지와 맥이 분명히 닿는) 번역 제목도 괜찮은 듯하다.

Posted by TUNC AUTEM
,

지난 금요일에 Bitcoin Standard 완역 원고를 제출했다. 전에도 얘기했듯 세 번에 나눠 제출하는 일정 덕분에 마감일까지 여유 없이 작업해야 했다. 예전 같으면 마감 전부터 다음 일에 지원했겠지만, 이번에는 최소 이번 달까지는 쉬려 한다. 물론 그러다 보면 어차피 올해 말까지 두 권 더 하기는 힘들테니 한 권만 더 하자는 생각에 더더욱 쉬게 될 가능성도 낮지 않다.


'비트코인은 틀리지만 블록체인은 맞다', '비트코인은 허상이지만 블록체인은 비트코인과 분리하여 활용할 가치가 충분한 기술이다'가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을 바라보는 지배적 시각이다. 그런데 저자가 화폐의 본질과 역사를 오스트리아 학파, 또는 자유지상주의 견지에서 살펴본 후 내리는 결론은 '비트코인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비트코인 아닌) 블록체인은 아니다'다. 물론 초점은 비트코인이 지닌 경화 특성에 있지만, 열기가 한 차례 빠져나간 후에도 블록체인이 유지하는 관심이 만만치 않은 현 상황에서 보자면, 화제의 중심은 오히려 본문 기준 6% 분량밖에 되지 않는 마지막 소챕터 'Blockchain Technology'에 두어도 큰 실수는 아닐 듯하다.


왜 블록체인을 쓰는가? 비트코인의 존재의의는 권력, 금융사 같은 중개자를 거치지 않고도 사용 가능한 자주적 화폐라는 데 있다. 거래 현장에서 현금을 바로 주고받지 않는 이상은 그것이 거래 상대방이 되었듯 금융사라는 중개자가 되었든 누군가를 '믿어야만' 하는 현재 경제체제에 비하여, 비트코인을 사용할 때는 본인 말고 누구도 믿을 필요가 없다. 이를 가능케 하는 요소가 바로 네트워크에 존재하는 연산력 50%를 동원하지 않고서는 사기를 치지 못하는 체계, 바로 블록체인이다.


신뢰 0%, 검증 100%로 만들어 낸 블록체인은 효율 관점에서 볼 때 매우 비효율적이다. 탈중앙 분산 장부는 중앙식 처리방식에 비하여 효율이 극히 낮다. 현 상태에서 비트코인 거래량은 하루에 300,000건 정도고, (개선되기 어렵고 또 개선되지 않는 편이 나을) 기술적 한계로 앞으로도 500,000건을 넘기 어렵기 때문에 보급형 노트북 한 대로도 두 시간만에 처리할 수 있다. 그만한 일을 처리하는 데 현재 비트코인 네트워크가 들이는 힘은, 노트북 2조 대 분이다. 즉, 1조 9,999만 9,999대는 중개자와 신뢰를 필요 없게 만드는 데 쓰이는 셈이다. 


초국가적 경화를 운영하는 경우라면 그 정도 '낭비'를 감당할 수 있다. 잘 해 봤자 '일정 수준 이상의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삼는 중앙은행 등 어떠한 권력과 중개자도 배제할 수 있는 (현재로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갔더라도, 규모가 80조 달러에 달하는 전 세계 화폐 시장을 잠식해 나가며 회수 가능하다. 또, 비트코인의 경우에 한정하여 말한다면, 기록이 비교적 단순하고 블록 크기가 1MB로 제한된 덕분에 장부 크기 증가 속도가 비교적 늦다. 9년 동안 운영한 비트코인 블록체인 크기가 200GB 정도인데, 몇 년 전이면 몰라도 이제는 이해당사자 개인이 돌리기에 크게 부담되지는 않는 규모다.


다른 분야는 어떨까? 그만한 낭비를 벌충할 만한 이익이 잠재적으로 있을 만한 (또는 그렇다고 대대적으로 홍보된) 분야를 저자는 

1. 디지털 결제 처리, 

2. 계약, 

3. 데이터베이스 관리

등 세 가지 들고 각각 현실성을 분석했다. 자세한 내용이야 책에 있으니 생략하고 저자의 의견을 말하면, 

- 앞에서 말했듯 블록체인은 거래 처리 효율로 봤을 때 현재 지배적 기술보다 크게 열등하므로, 현행 금융 결제 처리에 경쟁력이 없다.

- '스마트 계약'은 '코드가 법'이라고 내세우는데, 그렇다면 지금 법체계에서 법률 전문가가 지닌 우위가 지금 해당 언어에 능통한 프로그래머에게 옮겨갈 뿐이다. 또 DAO 사태에서 보았듯, 사실은 '코드가 법'조차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 등기 등 데이터베이스의 신뢰성을 높이려 한들, 이 블록체인의 신뢰성은 해당 자산과 블록체인 사이에 존재하는 기록/관리 책임자의 신뢰성을 넘지 못한다.

- 중개자를 없애려고 만든 기술을 중개자(예컨대 금융기관)가 채택해 봤자 성과가 개선될 턱이 없고, 또 (법률 분야처럼) 중개자가 여전히 필요하다면 연산력을 낭비한 보람도 없다.

정도가, 요약이라기보다는 일부 발췌 내용이다. 


무엇보다도, 블록체인 기술(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지만)은 만천하에 공개된 지 9년이 지났지만, 이제껏 시제품 이상을 달성한 사례가 없다는 것도 비트코인 아닌 블록체인은 무용하다는 실증 근거다.

Posted by TUNC AUTEM
,

Bitcoin Standard

번역/진행 2018. 5. 5. 00:39

지난 4월 중반부터 드디어 오랜만에 정식 작업 중이다. 중단 기간이 1년이 되기 전에 다시 시작하게 되어 기쁘기는 한데, 샘플 모집 시에 걸려 있던 3개월이라는 일반 조건 뒤에 '알고 보니' 부가조건이 붙어 있어 꽤 부담이 된다. 체감상으로는, 서너 권 째를 완료하고 돌이켜 보니 '그 때는 대체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왜 한다고 했을까'라고 의아해질 정도이던 첫 번째 단독 번역 책과 별 다르지 않다. 게다가 이 작업도 한동안 쉬고 나면 손과 머리가 굳는지, 첫 2주 정도는 속도가 나지 않아 마음고생을 했다. 다행히 지금은 어느 정도 속도가 돌아온 듯하다. 


(개인 기록용으로 남겨두는데, 번역 일을 놓은 지 넉 달 정도 되었을 때 치른 2017년 토익 점수는 번역을 끊이지 않고 했던 2016년 토익 점수보다 15점이 떨어졌다. '영어는 꾸준히 해야 한다'는 말에 뒷받침이 되는 사례인데, 올해 시험 결과는 과연 '점수는 한 번 떨어졌어도 다시 꾸준히 하면 돌아온다. 마치 10년만에 자전거 타기처럼'을 뒷받침할지.)


이것도 수주하는 데까지 약간 곡절이 있었다. 직전 샘플 지원 건에서 '또' 실패했는데, 팀장님이 메일로 실패 사실을 알리면서 '지금 샘플 진행중인 다른 책에 지원해 보면 어떻겠냐'고 물어주셨다. 정식 모집시에도 지원할까 잠시 고민했던 책이기는 한데, 아무래도 전공과 경력에 지나치게 딱 들어맞는 듯하여 그때도 지원하지 않고 이번에도 고사했다. 그러고 10분인가 후에 수주게시판에 이 책이 올라왔다. 주제가 이미 한 풀 꺾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도 지원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정식 모집 개시 후 10분이 지나 무심코 들어가 보니, 평소 같으면 5분 이내에 지원자 수가 찼을텐데 아직도 '지원 가능' 상태인 거다. 내가 또 비트코인하고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니니 한 번 지원해 볼까, 하는 생각에 지원 버튼을 누르고 샘플을 내고 합격을 했다. 


제목에서 보듯 비트코인 얘기다. 그런데 'standard'는 금본위제, 즉 'gold standard'와 용법이 같다. 그러니 제목은 직역하면 '비트코인본위제'다. 아직 초벌도 완성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금까지 책에서 받은 인상만으로도 장단점이 뚜렷하다. 구분하지 않고 묶어서 써 보면

- 내용 중 반 이상이 비트코인 자체보다는 기초적 화폐론, 그리고 건전화폐=경화=대략 금이 화폐로서 좋은 점을 다루는 데 쓰였다. 출판사에서 제목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겠는데, '비트코인'에 끌려 읽은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당황할 수도 있겠다.

- 서술 방식이 간결하다고는 못 하겠다. 초벌은 되도록 원문 구조대로 하는데, 교정은 손을 대야 할지 고민중이다. 그리고 납품본에서 원문을 되도록 유지한다 해도, 최종본은 수정이 많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 한 번 읽기에는 재미있지만 굳이 안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 꽤 있다. 현대예술 부분 등은 동의할 사람도 많겠지만 공격할 사람도 많을 것인데, 그 중에는 예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주제까지 버릴 사람도 분명 꽤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현대예술보다는 가족제도가 더 마음에 안 드는 예시다.

- 그런데 (직접 번역한 영향인지는 몰라도) 설득력은 굉장하다. 챕터로는 40% 정도 되지만 분량으로는 20% 정도 될 4장까지 작업하면서 전체 논지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앞 문제가 아쉽기는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 역시 책의 개성 아닌가 싶다. 어차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단점을 보강하느니 장점과 개성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편이 나을지도.


결론을 말하자면 이 역시 좋은 책이다. 요청대로 특별한 일정에 따라 납품하는 만큼 빠르게 나왔으면 한다.



그리고, 비트코인이라는 주제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힘을 잃었을까? 1주일 전 쯤 저자의 다른 책을 검색하려고 아마존에 들어갔다가 확인한 이 책의 판매순위는, 킨들 판 경제경영서 중 1위였다. 그리고 한때 7백만원선까지 깨졌던 비트코인 시세는 요즘 원화 기준 1천만원을 회복했다.

Posted by TUNC AUTEM
,

올해 6월 말 이후 오랜만에 샘플 작업 중이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비록 정식 번역 작업은 아니지만 충실감을 느껴본다. 방향을 어디로 잡고 무엇을 하든 매일매일 몸만 열심히 움직이면 제대로 사는 거라는 맹목적 근면 지상주의의 혐의가 엿보이기는 한다. 어쨌든 표면적으로 내세울 만한 근거는, 원래 그래서는 안 되지만 무산노동자로서 자투리가 될 수밖에 없는 시간을 그나마 유용하게 - 독서와 어학학습, 그리고 (샘플의 경우 선정된다면) 시간 환금까지 동시에 달성하는 방식으로 - 보내는 방법이라는 데 있다. 지난 3년을 통틀어 몸은 가장 분주하고 마음은 가장 번잡했던 4개월을 보냈지만, 돌이켜 보면 역시 '하려면 못 할 것은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해야 했느냐'고 물어본다면, '하는 이상으로 가치있게 보냈다'고 말할 수 있어 다행이기도 하다.


이렇게 새 책에 착수할 지도 모르는 상태인데, 전공이 딱 들어맞지는 않는 이번 샘플에 덜컥 지원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주 전에 받은 연락이다. <Txt me>를 납품받은 출판사가 검토 결과 출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기획서와 완역 원고 내용이 달라서라고 한다. 선인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게 지급한 비용, 담당자가 소비한 직간접 및 시간 상 기회비용 등을 고려하면 정말 예기치 못한 결론이다. 게다가 번역자로서 말하건대 이 책은 마케팅 전문가가 말하는 스마트폰의 사회적 영향력을 여러 각도에서 흥미롭게 다룬 양서다. 기획 당시 생각했던 것보다 내용이 너무 깊었는지 아니면 너무 얕았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한계이익조차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으니 출간을 접었을텐데, 번역료는 받았으니 금전적으로야 아쉬울 것 없고 그저, 죽어서 이젠 없지만 출판사 컴퓨터 안에서는 살아가는 한국어 번역본의 첫 독자로서 아쉬울 뿐이다.


그리하여 내 '인생의 무게 下' (내 경우에는 기납품 미출간이며 향후 출간 전망도 굉장히 낮다고 판단하는 원고) 목록은 <Modernist Cuisine (중 극히 일부)>, <Smart Growth>, <Txt Me> 등 셋으로 늘었다. 그 중에도 <Txt Me>는 실종(사망 추정)이 아닌 사망 확정으로서 최초 타이틀을 가져갔다. 최초의 계약, 최초의 단독 계약, 최초의 지명 계약, 최초의 인세 제안... 그리고 최초의 출간 불발 확정까지. 최초는 계속된다. 어떤 최초일지 예상하지 못할 뿐이다.

Posted by TUNC AUTEM
,

Txt Me

번역/진행 2017. 5. 1. 16:48

작년 12월 말에 가족과 함께 괌에 다녀왔다. 9월부터 시작한 Money Changes Everything 초고를 여행 이틀 전에 마쳐, 깔끔하게 일거리를 놓고 가게 되어 마음이 편했다. 하긴 마음이 편하지 않아봤자 가족여행에서 내(그리고 나와 같은 아빠) 역할이 어떤 것인지 안다면 어차피 큰 성과를 낼 수는 없지만.


이틀째인가, 해변에 나갔다 오니 바른번역에서 부재 중 전화가 와 있었다. 지금 하는 일 데드라인이 석달이나 남았으니 샘플 의뢰는 아닐텐데 대체 뭔가 하며 전화를 걸어보니 새 책 의뢰였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의뢰한 일정이 3월 말까지. 원하는 일정을 말해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3월 말부터 착수할 만한 여유는 없다 했다. 최소 5월말까지는 있어야 할 것 같다 하고, 일단 초안을 번역해 보았다. 빅데이터로 대표되는 통계 방식과 정확도 향상이 사회에 끼칠만한 위험을 다루어보는 책인데 전개방식으로 보나 주제로 보나 딱 내가 맡을 만한 책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일정이 도저히 맞지 않아 공개 모집을 통해 다른 분이 맡게 되었다. 초안이나마 2장까지 휙휙 진행해 보았고 그러다보니 4월말까지는 못할 것도 없겠다 생각이 들어 아쉬웠지만, 외관상 평판이나 개인 일정 및 건강을 생각하면 실망할 일은 아니다.


그러고 한 주였나, 같은 출판사에서 바른번역을 통해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다른 책으로 5월말까지, 그리고 필요시 일정 조정 가능하다는 조건이었다. 파일을 휙 넘겨보니 대충 핸드폰 얘기인 듯한데.. 내 성향이나 커리어를 생각하면 딱 맞아떨어지는 듯하지는 않아 지난 번 책을 놓친 것이 더욱 아쉬워지기는 했다. 그래도 같은 출판사에서 뭘 그렇게까지 잘 봐주었나 하는 고마움이 들어 마음에 드는 책이라고 반쯤 영혼을 섞어 답했다. 일정은 6월 중순까지. 그 <Txt Me>를 어제 화면상 교정(그러니 1교)까지 마쳤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정리하면, 마케팅 업계에서 모바일/디지털 추세를 몸소 체험하고 여기에 올라타 나름대로의 업적을 쌓은 유명 경영계 인사가 쓴 스마트폰 찬가다. 이제 안경이나 속옷과 다를 바 없이 확장된 신체 또는 부속지가 된 스마트폰을 주제로 한다면 보통은 스마트폰의 해악이나 최소한 주의할 점을 중심에 깔면서, 유통업 등 스마트폰이 충격을 가져온 분야 같이 비교적 중립적인 지역까지 다루지 않을까? 집중력 저하, 인간관계 단절, 언어 파괴 등을 소재로 삼아서. 그런데 저자 보닌 버(Bonin Bough)가 보는 스마트폰이란, 일단 경영 부문에서만 보아도 유통업 파괴자 역할에서 그치지 않고 음악 산업의 새로운 구세주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음악 불법복제는 데스크탑 시대의 유물이지, 차라리 스트리밍 결제가 속 편한 스마트폰 시대까지 이어질 해악은 아니라는 것이다. 언어 파괴? 스마트폰과 인터넷 시대에 언어가 파괴된다 해도, 언어가 인터넷에서 더 많이 쓰이기 때문에 더 많이 파괴될 뿐이다. 심지어 포르노그래피조차도 '새로운 성교육'이라는 제목 아래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역할마저 했다는 식으로 다룬다. 스마트폰 읽기에 따른 독해능력 저하 정도야, 새로운 매체의 도입에 따른 그야말로 'side' effect 정도로 넘겨버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모든 여건이 동일할 때 놓친 책과 이 책을 놓고 고르라 했다면 나는 십중 십 놓친 책을 골랐을 것이다. 주제, 전개방식, 커리어, 주 관심사를 볼 때 놓친 책은 모든 면에서 나와 그야말로 딱 맞는 책이다. 마치 만나기 전에 나열한 이상형의 조건이 모두 충족되는 상대처럼. 하지만 (이번 책을 번역하며 참고한 <모던 러브>에서 명확하게 든 반례에서 보았듯) 그런 조건이 '만나보니, 알고 보니' 이상적인 짝을 만나는 데 진정 기여할까? 초고를 마쳤을 때나 1교를 마친 지금이나 드는 생각인데, 나는 지난 책을 놓치고 이번 책을 맡게 된 행운에 감사한다. 반복하자면 주제, 전개방식, 커리어, 주 관심사 면에서 최선과 (지나치게 많이는 아니고) 약간씩 어긋나기에 그만큼 내게 적당한 책이었다. (미드에서라면 you complete me 내지는 it completes me 정도 표현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책 덕분에 내가 complete 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따지면 그 사람들도 사귀거나 결혼한다고 complete해 진 것은 아니니까)


하나만 더 기록한다. 저자 경력은 마케팅 분야다. 그런데 1장부터 10장까지 제목을 보며 짚어보면, 언어/육아/성/정치/기억/혁신 등 마케팅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분야까지도 꽤 흥미롭게 짚어낸다. 이처럼 다양한 근거는 일하면서 수집한 것일까? 아니면 본업과는 약간 거리를 둔 일종의 취미 또는 외도로 연구한 것일까? 업계 관계자용 전문 서적이 아니라 대중서를 쓴다면 이 정도 넓이와 깊이(소위 T형)는 갖추어야겠기에 드는 의문이다.

Posted by TUNC AUTEM
,


<Money Changes Everything> 초안이 작년 12/22에, 화면상 교정이 아마도 1월 말쯤에, 그리고 인쇄후 교정(1차)이 3/5에 끝났다. 그런데 왜 사진은 중국화폐사인가 하면, 문헌 참고를 위해 서강도서관, 국회도서관, 회사도서관, 로욜라도서관을 뒤지다 못해 중고로 사기까지 한 책이라서다. 어차피 로욜라도서관에 있는 책이긴 하지만, 중고가가 31,000원으로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던데다 왠지 서가에 꽂아놓으면 그럴듯해 보일 듯해서다. 뭐 그 덕분에 필요한 부분을 찬찬히 읽어보고, <관자> 참고부분을 짚어냈으니 돈값은 이미 했다고 생각하고 지나가야겠다. (1,000쪽짜리 <관자>를 세 번 훑어가도 찾지 못한 참고부분을 덕분에 찾아냈으니 근거도 충분하다.)


이번 책 번역에는 로욜라도서관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자료는 많겠지만 대출도 안되고 사실상 점심시간에만 방문 가능한 국회도서관, 대출이 비교적 자유롭고 접근성도 좋으나 자료 양에 한계가 있는 서강도서관과 회사도서관에 비하면 로욜라도서관은 비록 1회에 세 권이나마 대출도 되고, 주말 작업에 자주 이용하는 스타벅스 근처라 접근성도 그나마 낫다. 첫 대출이 16/10/15니 이 책 번역때부터 쓴 셈인데, 오늘까지 대여권수가 총 21권에다 지난 두 주 동안 토요일 오전마다 교정과 입력은 제쳐두고 아예 참고문헌만 뒤진 걸 생각하면 참고한 자료량이 내 기준으로 한 권 번역 일 치고 상당하다. 협정회원 제도를 운영해 준 서강도서관과 로욜라도서관에 (담당자가 볼 리 없는) 감사를 표한다.


레퍼런스 관련해서는 하나 더 적어둘 일이 있다. '금융' '역사'서인 이 책에는 수많은 인명과 사건과 연도가 나온다. 저자가 참고했을 원문(보통은 그 원문의 한국어 번역본)을 이리저리 찾고, 예컨대 중국 인명을 현대 중국어 발음에서 한국 한자어로 바꾸기 위해 관련 출처를 찾아보는 일은 번역 본 건 못지않게 재미있는 일이기는 한데 출처가 검색되지 않으면 매우 답답해진다. 600쪽짜리 책을 쓰면서 세부사항에 오류가 없기는 힘든 일인지 저자 홈페이지에도 errata가 실려 있기는 한데, 그 외에도 물어보고 싶은 사항이 상당히 많았다.


고민하다, 내 번역 역사 최초로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 질문했다. 소개와 질문내용과 '바쁘신 건 알고 또 그래서 답장을 안 보내셔도 상관없지만 번역본의 품질 향상을 위해 답장을 부탁한다'는 내용을 보낸 후 1시간만에 친절한 답장이 왔다. 약간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여 전체 질문에 대한 답까지 듣는데는 1주일 정도 더 걸렸다. 어쨌든 이처럼 신속하고 친절한 태도가 자기 저작에 대한 애프터서비스나 결과물의 품질 향상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쪽 교수들이 전반적으로 갖춘 태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앞으로도 저자에게는 일단 질문을 해 볼 일인 듯하다.


저자인 Goetzmann 교수는 내 질문 중 중국어 원어명에 관한 것에 관해, 자신보다는 해당 부분의 원 출처인 Valerie Hansen 교수와 Richard von Glahn 교수에게 직접 묻는 편이 낫겠다고 답했다. 그래서 발신 메일은 세 통으로 늘었다. 한센(국내 번역서의 저자명 표기를 따른다) 교수는 저자와 같은 대학에서 일해서인지 몰라도 상당히 답변을 빠르게 해 주었는데, 수신자를 내가 아니라 Goetzmann 교수로 지정하여 전달 과정이 한 번 더 들어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감사 메일은 꿋꿋하게 한센 교수에게 보냈다. von Glahn 교수에게 보낸 메일은 1주일 정도 답이 없어 반쯤 포기하고 있었지만, 결국에는 매우 상세한 답변이 왔다. 두 부분 모두 직접 물어보지 않았다면, 예컨대 중국 삼국시대에 차오차오와 류베이와 쑨취안이 싸우는 형국이 될 뻔했다. 세 교수 모두에게 (역시 본인들이 볼 리 없는) 감사를 표한다.


중국 인명 관련하여 하나만 더 남긴다. 한센 교수 질문과 관련하여 나는 국회도서관에 방문하여 Origins of Value의 해당 부분을 복사까지 해 오며 살펴보고, 아스타나 고분군이나 투르판 출토품 연구기록에 원자료(정확하게 말하면 당나라 시대 장안에서 제작되어 투르판까지 실려온 인형의 팔 부분을 이룬, 전당포 영수증) 사진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점심시간 세 번을 할애하여 900번대 해당 서가를 뒤짐은 물론 대출대에 일본/중국어 자료까지 신청하여 넘겨보았다. 대출대에서 받은 자료 다섯 권은 모두 합쳐 두께가 40cm 정도는 되어 보였는데, 직원이 서가에서 대출대로 옮기다 손목을 삐끗했다. 직원분께 (역시 본인이 볼 리 없는) 사과를 남긴다. 물론 자료에는 해당 내용이 없었다. 이렇게 투입 시간으로 따져 열 시간은 될법한 탐색은 한센 교수의 답 메일 하나로 해결되었는데, 그 결과 장안에서 전당포에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려간 사람 이름이 崔基와 王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작 저것때문에 열 시간과 한센 교수(+메일을 전달해 준 Goetzmann 교수)의 시간까지 뺏었나 자괴감이 들기도 하는데, 그래도 당나라 시대 장안에서 돈 빌린 사람이 추이지와 왕솽이라고 쓰지 않게 되어 다행이다.

Posted by TUNC AUTEM
,

<더 초이스>가 최초의 계약, <공유경제는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가>가 최초의 단독 계약이었다면 <전문직의 미래>는 최초의 '동일 출판사 두 번째 계약'이자 옮긴이로서 최초로 글을 남긴 책이다. 바른번역에서 '출판사가 역자 서문을 원하는데 원하는 분량은 A4 2/3장 정도로 적지만 기일도 이틀밖에 없다'는 말에 잠시 고민했지만, 뭐 생명이나 생계에 지장이 없다면 지르는 게 답이라는 정신에 따라 하자고 마음먹고 출판사 담당자(고혜림 과장)와 통화를 했다. 애초에는 계획이 없던 일이지만 (그러니 서문 제출 후 1주일만에 초판이 서점에 깔렸던 것이다) 내용이 딱딱하기도 하거니와 저자는 '요즘 이슈가 된 4차 산업혁명'을 전혀 언급하지 않아, 보통은 역자가 글을 쓴다 해도 후기 형식으로 들어가는 것을 이번에는 발제처럼 가볍게 내용과 의의를 짚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였다.


<공유경제> 한국어판 제목과 <심플, 결정의 조건> 마케팅을 보고 느꼈던 일이지만, 확실히 출판사는 상품을 만들어 낼 줄 안다. 원서에서 제목은 고사하고 내용에도 일언반구 없던 '4차 산업혁명'을 제목에 붙인 감각도 그러하거니와 (물론 번역한 내가 보기에는 타당하다) 옮긴이 후기가 아닌 서문을 붙인 것도 독자가 대략 흐름을 잡아 대비한 후 결코 쉽지만은 않은 책 내용으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었던 듯하다.


다만 옮긴이로서 안타까운 점 하나를 꼽자면... 12월 초에 출간된 책 증정본을 아직도 받지 못했다. 2주만에 2쇄를 찍어낼 정도로 물량이 부족한 것이 첫째, 그리고 출판사 담당자가 다른 책 마감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바빴던 것이 둘째 이유다. 출판사마저 이 책이 이렇게 잘 나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나 역시, 내가 번역한 책이 다 그랬듯 참 훌륭한 책이라서 옮길 때 나 자신은 즐거웠지만 독자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확신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는 책 판매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이나 (비록 원서의 내용은 훌륭했음을 내가 보증하지만) 매끄러운 문장 (비록 전문 교정자의 교정까지 잘 거쳤음을 나도 알고 있지만)보다는 사람의 눈길을 끌고 놔주지 않는 제목이 아닐까 하고 의심해봐야 한다.

Posted by TUNC AUTEM
,

7월 중순에 제출했는데 아직 출간은 안 된 <The Future of the Professions>는 여태까지 번역한 책이 모두 그러했듯 새로운 관점과 지식을 주었다. 이 책의 키워드로는 당연히 '전문직'이 첫 손가락에 꼽히겠지만, 사실 '기술', 또는 '인공지능'도 둘째 손가락이 아니라 또 하나의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이 또 하나의 최중요 키워드 맥락에서 나온 용어 'AI fallacy(제출본에서는 단순히 '인공지능 오류'라고 했는데, 한 겹 더 풀자면 '인공지능을 바라볼 때 범하는 오류'다)'는 내가 인공지능의 유용함이나 파괴력을 생각할 때 기준점이 되었다. 


예를 들어, 수십만 킬로미터를 사고 없이 잘 가다가 최근 들어 사망자를 낸 자율주행차 문제를 생각해 보자. 회사 주가는 크게 떨어졌고 사람들은 '과연 저렇게 위험한 기술에 사람 목숨을 맡길 수 있느냐'고 우려하게 되었다. 한 발 더 나아가, 그 유명한 사고실험 '직진하면 네 명이 죽고 방향을 꺾으면 두 명이 죽는다면 핸들을 그대로 두어야 하느냐 돌려야 하느냐'를 기계가 판단할 수 있느냐, 또는 판단하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들고 나오기도 한다.


인공지능의 필연적 미숙함을 드러내는 선동으로는 효과가 좋은 질문이다. 한 인공지능 강의에서도 이런 얘기가 있었다. "어떤 분야에 인공지능이 도입되려면 사람 생명까지 달려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운전이나 수술, 또는 법률 분야에는 인공지능이 근시일 안에 도입되기는 힘들 것이다. 반면, (최소한 직접적/1차적으로는) 사람 목숨까지 좌지우지하지 않는 분야 종사자는 위험하다. 대표 분야가 바로 금융이다."


인상과 주관을 제쳐놓고 본다면 그러한 관점은 정당한가? '인공지능 오류'는 이 때 유용한 도구다. 인공지능의 적용 타당성을 판단할 때는 그 자체의 실패율만 기준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기존 인간의 실패율과 비교해야 한다. (내가 잘 모르니 가상 수치를 들자면) 딥러닝을 이용한 사물 인식 정답률이 98%라고 할 때, '2%나 틀렸으니 형편없다'는 결론은 조급하다. 2%나 틀렸다 해도, 알고보니 사람의 정답률이 95%였다면 이제 물체 인식은 기계에게 맡기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합리적' 의견이 항상 채택되지는 않는다. 당연하지만.)


자율주행차 얘기로 돌아가 보자. 첫째, '저렇게 위험한 기술에 사람 목숨을 맡길 수 있느냐?' 이를 판단하려면 예컨대 "30만 킬로미터 주행했더니 두 명이 죽었더라, 그 중 하나는 다른 유인차량이 실수해서 죽었으니 참작할 여지가 있지만 다른 하나는 물체 인식 자체가 잘못되어 죽었다, 그러니 위험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숫자만으로 비교하려 한다 해도, 인간이 여지껏 운전한 차량의 운행거리 당 사고율이 얼마이고 이 중 무엇이 높은지 알아야 한다. 물론 기계는 음주운전이나 졸음운전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까지 나올 수 있겠지만 이는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면 사고율에 녹아 있을 숫자일지 모르니 넘어가자.


두 번째 문제도 인공지능 오류로 판단할 만하다. 그런 도덕적 판단을 기계가 내릴 수는 없다, 또는 기계가 내리게 해서는 안 된다, 또는 이 문제의 해답을 낼 때까지 기계가 운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들을 하는데, 그렇다면 묻고 싶다. "그렇다면 운전자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당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과 합의해 낼 수 있는가?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뭐 행운을 빈다.) 그리고, 지금 저 문제를 '올바르게' 풀어낸 사람만 운전면허를 받고 운전하는가?" 바로 '기계와 인간에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오류', '인공지능 오류'다.

Posted by TUNC AUTEM
,


번역 작업 중에도 관련한 글을 남겨, 책 내용을 다시 다룰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다.

다만 책을 둘러싼 얘기만 남긴다.


1. 회사를 다니면서 번역까지 하기가 만만치는 않다. 내게 번역이란 부업이라기보다는 취미에 가깝기 때문에 마음이 괴롭지는 않은데 몸은 어쨌든 힘들다. 한 권을 번역하는 기간 중에서도 가장 힘든 시기는 첫 한 달이다. 두 달이 기일이라면 첫 달에 초고 완성, 다음 보름 동안 컴퓨터에서 1차 교정, 다음 1주일 정도 책과 거리를 둔 후 인쇄하여 1주일 동안 2차 교정하는 일정을 기본으로 하는데, 보통 일정을 두 달 반에서 석 달은 받으려 하기 때문에 꼭 첫 달에 초고를 마치지 않아도 여유는 있는 편이다. 하지만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입장에서 초반에 그런 여유를 갖기는 힘들어, 첫 두 권을 번역할 때는 초고 완성 후 꼬박꼬박 1주일 정도 감기몸살을 앓았다.

반면 이번에는 분량이 그 전 책에 비하여 반에서 2/3정도 되었고, 일정도 석 달로 시작했다. 초고 완성을 3주에 마치고 (마친 날 '어? 벌써 끝났나?' 하는 당혹감이 지금도 생각난다) 1차 교정까지 마친 후 한 달 동안 라즈베리파이 RC 자동차 연구와 중국어 공부에 매진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마감 15일 후 시작한 다음 프로젝트에서 제대로 반작용이 오게 되는데...


2. 미국에 유학 간 친구에게 <심플, 결정의 원칙>과 이 책 증정본을 한 권씩 보냈다. 공짜로 주는 것이니 미국 독자에게 열심히 홍보하라고 과제를 냈더니 국회의사당, IMF, 미술관 앞에서 책을 읽는 시늉을 하며 인증사진을 찍어 보냈다. 애초에 그런 곳 앞에 '서서' 책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므로 홍보효과는 뛰어났다고 믿고 싶다.  (왜 한국어 번역본을 미국 독자에게 홍보하는지는 접어두자)


3. 책을 한 반쯤 번역하던 중, 얼마 후 있던 국회의원 선거를 생각하며 '선거 전에 출간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에 대선도 있고 국회의원 선거도 또 있을 것이며 보편배당(시민배당) 의제는 앞으로도 계속 논쟁 대상이 될 것이니 짧게 볼 필요는 없겠지만, 책도 신선도를 무시할 수 없는 상품이고, 또 좋은 책은 많이 팔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4. 이번 책은 출판사에서 바른번역에 리뷰어 모집을 의뢰했다. 16명인가를 모집했는데, 내가 여태 온라인서점에서 확인한 리뷰는 6개다. 마감과 계약 엄수는 중요하다.

Posted by TUNC AUTE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