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만약 미사가 끝난 후에도 그 교훈을 깨달은 존재로 남으려면, 그것은 평소에 매우 익숙하던 자기 중심의 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상태를 유지해야 가능한 일이리라. 그러기 위해서 미사는 현대 세계 특유의 균열을 조금이라도 치유해내는 발상을 제공해야 한다.

그런 발상 가운데 하나를 먼저 들자면, 사람을 특별한 장소에 들여 혜택을 취하자는 것이다. 그 장소는 한 집단이 내세우는 주장에 열광을 일으킬 만큼 매력적이어야 마땅하리라. 또 그 장소에서는 방문객이 평소와 달리 이기주의를 유보하고 집단으로서 즐겁게 몰입할 만큼 영감이 넘쳐야 한다. 현대의 공동체 모임 장소에서는 대체로 실현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외양부터가 공동체로서 참여하는 일이 어리석다고 확증하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미사가 주는 교훈은, 상호작용하고 있는 사람에게 규범을 제시하여 인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있다. 교인에게 정해진 시점마다 고개를 들고 일어서고 무릎을 꿇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마시고 먹으라고 지시하는 미사경본의 복잡한 전례를 살피다 보면, 인간은 본래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을 인도받을 때 기뻐하는 본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개인 사이에 그토록 심오하고도 고귀한 유대를 만들어내려면, 한 집단 안에서 아무런 목표도 없이 각자 알아서 어울리게 내버려두기보다는 차라리 안무하듯 치밀하게 계획한 일련의 행동을 따라하도록 시키는 편이 효율적이다.

미사에서 얻는 마지막 교훈은 미사의 역사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좌석에는 교인이 앉아 있고 맞은편 제단에는 성체와 포도주 잔을 든 사제가 서 있도록 절차가 확정되기 이전, 즉 예배로 정착되기 이전에 미사란 다름 아닌 식사였다. 다들 알고 있듯 성찬식이란 원래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교인이 개인사나 가사를 잠시 중단하고, 포도주와 양고기와 무교병을 올려 둔 커다란 식탁에 모여 앉아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일이었다. 이들은 이야기하고, 기도하고, 그리스도와 서로에게 헌신하겠다고 새로 다짐했다. 유대인이 안식일에 식사하며 깨닫듯(?), 기독교인은 먼저 신체의 허기를 충분히 채운 후에야 다른 사람이 필요한 것에 기꺼이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을 잘 이해했다. 이런 모임은 기독교의 미덕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기리는 것으로, 사랑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따 '아가페 잔치'라고 불리며 예수가 사망한 후 364년 라오디케아 공의회 이전까지 정기적으로 열렸다. 그러다 몇몇 모임이 도를 넘자 불만을 터뜨리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급기야 초기 교회에서 아가페 잔치를 금지하는 한편, "신앙심 깊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기 집에서 가족과 함께 식사해야 한다"는 안타까운 결정을 내렸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모여 벌이는 잔치는 오늘날 성찬식으로 알려진 영적 연회로 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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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에서 가난, 슬픔, 실패, 상실 등을 그토록 많이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교회가 생각하기에는 가난한 자, 마음이 약한 자, 절망한 자, 나이 많은 자가 인류의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우리 자신의) 가급적 부정하고 싶은 측면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일단 이런 측면을 인정한다는 것은, 서로를 원하는 욕구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이 잘난체하는 순간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라틴어로 수페르비아superbia라고 가리킨) 오만의 죄에 인격을 장악당하여 주위 존재에 눈을 감아버리게 된다. 만사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고 자랑할 때, 정작 다른 사람에게는 둔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정이란, 두려워하거나 후회하는 일을 두고도 감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자라날 기회를 얻는다. 그 외 다른 이야기는 그저 보여주기에 불과하다. 미사는 오만을 벗어던지라고 권한다. 남에게 폭로당하기 무서운 결함, 놀림당하기 좋은 경솔한 행동, 친구끼리 대화를 피상적이고 무디게 하는 각자의 비밀... 이는 인간이 지닌 조건의 일부에 불과하다. 교회 건물 안에서는 억지로 꾸미거나 거짓말할 이유가 전혀 없다. 고전에 흔히 등장하는 영웅과 닮은 데가 전혀 없는 한 남자이자, 로마의 포악한 병사나 원로원의 금권 정치가와도 닮은 데가 전혀 없는 한 남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중에서 가장 지고한 존재이며 왕 중 왕이라는 영예를 받아 마땅한 한 남자가 겪은 공포와 나약을 기념하려고 지은 것이 바로 이 건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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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같은 세속적 시대에서는 가족 사랑과 공동체 정신이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 정치인이 사회 개혁을 열망한다고 말할 때 가족을 전형적 상징으로 예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점에서 더 현명하고 덜 감상적인 편은 정치인이 아니라 기독교다. 기독교는 가족에 집착하다 보면 결국 애정의 범위가 좁아지게 되고, 또 개개인과 온 인류의 연계를 이해한다는 더욱 폭넓은 문제를 고민하지 못하게 된다고 인정한 바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러한 공동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세속 지위에 대한 집착을 모두 버리라고 요청한다. 권력과 금전이라는 외적 속성보다 사랑과 자비라는 내적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군주와 거물을 설복시켜 목수 한 사람의 조각상 앞에 무릎을 꿇고, 또 농부와 청소부와 마부의 발을 손수 씻기도록 만들기까지 매우 온건한 신학 논증 말고는 어떠한 강압도 동원하지 않은 것은 기독교가 이룬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교회는 그저 세속적 성공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세속적 성공 없이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르쳐주었다. 교회는 애초에 사람들이 왜 지위를 얻으려고 노력하는지 정확히 간파하고, 계층과 직위에 대한 집착을 기꺼이 포기할 만한 환경을 교회 안에 만든 셈이다. 교회가 제대로 이해한 대로, 사람들이 저마다 권세를 얻으려고 분투하는 것은 지위가 낮을 때 당할 만한 일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위엄을 잃고, 남에게 보호해 달라고 기대며, 친구 하나 없는 신세가 되고, 거칠고 절망스런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을 차례차례 바로잡아주는 것이 미사가 주는 장점이다. 미사를 올리는 건물은 대체로 화려하다. 그 건물이 원래는 인간이 평등함을 기억하라는 데 바친 건물일지라도, 아름답기로는 웬만한 궁전을 뛰어넘기까지 할 정도다. 마시에 동석한 사람들마저도 매력적이다.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 불행인 상황일 때, 다시 말해 '평범한 사람'이 '진부하고 우울한 사람'과 동의어인 상황일 때라면, 명예와 권세를 열망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대성당에 모여 대영광송(Gloria in Excelsis)을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에 교인들이 느끼는 '우리'는, 저 바깥 어느 쇼핑몰이나 별볼일 없는 번화가에서 마주치는 군중과 완전히 차원이 다르기 마련이다. 낯선 사람끼리 모여 별이 총총 박힌 궁륭을 올려다보며 한목소리로

"주여, 오소서, 저희들 가운데 사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저희에게 힘을 주소서"(?출처)

라고 낭송하다보면, 문득 인간이라는 존재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사라진다.

그 결과, 이제부터는 일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말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껏 경력으로 얻으려던 존경과 안정을 가톨릭 공동체 안에서 이미 이루고 있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따뜻하고 인심 좋은 공동체는 호의를 베풀면서도 대가로 세속에서들 원하는 조건을 요구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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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교는 인간의 고독을 상당히 잘 안다. 우리가 종교가 말하는 내세나 자기 교리의 초자연적 기원을 딱히 믿지는 않더라도, 자신과 타인을 구별하는 요소를 이해하는 종교의 방식을 존중하고, 또 평상시에 타인과 연결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편견 한두 가지를 녹여(?) 없애려는 종교의 노력을 존중한다.

물론 가톨릭 미사는 무신론자에게 이상적 환경이 아니다. 의식에 쓰이는 말은 십중팔구 이성에 매우 거슬리거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워낙 긴 시간이 들어서 미사 중간에 졸고 싶은 유혹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미사의 예식에는 교인들 사이에 애정으로 맺은 유대를 미묘하게나마 강화하는 요소가 가득하다. 따라서 무신론자조차도 미사의 예식을 거리낌없이 공부하기도 하고, 심지어 배운 것을 세속 영역에서 적절히 활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톨릭은 공동체 정신을 만들기 위하여 우선 장소를 이용한다. 지상의 한 구석일 뿐인 이 장소의 주위에 울타리를 두른 후, 이제부터 그 안에서 통용되는 가치는 (예컨대 사무실이나 체육관이나 거실 같은) 바깥 세상에서 통용되는 가치와 완전히 다르다고 선언한다. 건물은 건물마다 특유의 행동 규범을 부과함으로써 방문객에게 기대하는 바를 재설정할 기회를 소유주에게 준다. 예를 들어 미술관에서는 화폭 앞에서 조용히 감상하는 습관이 옳다고 간주되고, 나이트클럽에서는 음악에 맞춰 두 팔을 흔드는 습관이 옳다고 간주된다. 그리고 커다란 목제 출입문에다 입구 주위에 천사상을 300개 조각한 교회에서는, 낯선 사람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더라도 강도나 광인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살 위험이 없는 보기 드문 기회가 허락된다. 이곳에서만큼은 (시작 예식의 인사 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 약속된다. 교회는 오랜 세월 동안 확고히 세워 온 위신과 학문과 장엄한 건물을 빌려줌으로써, 우리가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고자 하는 수줍은 욕망을 실현하도록 돕는다.

교인의 구성도 의미심장하다. 미사에 참석한 사람의 나이, 인종, 직업, 학력, 수입은 서로 같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무작위로 추출한 집단에 가까울 것이며, 다만 특정한 가치에 헌신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미사는 사람들이 경제력과 지위에 근거하여 만들기 마련인 집단 사이의 벽을 적극적으로 무너뜨리고, 우리를 드넓은 인간성의 바다로 내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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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고독하게 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계를 만들어 나가려는 희망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현대 도시라는 쓸쓸한 협곡에서 가장 귀한 감정은 아마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가 말하는 사랑이 아니고, 모든 인류에게 널리 통하는 보편적 형제애도 아니다. 반대로 질투하고 협소하며 궁극적으로는 저열하기까지 한 사랑이다. 낭만적 사랑은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평생 완벽하게 지속되는 친교를 서로 성취할 수 있는, 그리고 다른 사람을 만날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게 될 특별한, 바로 그 한 사람을 미친듯이 찾아 나선다.

현대 사회에서 어떤 공동체로 들어가는 길 한가운데에는 각자 일에서 거둔 성공에 대한 평가(?)가 놓여 있다. 사교장에서 맨 처음으로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우리는 공동체의 출입문이 코앞에 있음을 직감한다. 이 질문에 내놓는 답이, 저 하찮은 작자들에게 따뜻한 환영을 받느냐, 아니면 완전히 버림받느냐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쟁이 만연한 사이비 공동체에서라면, 각자가 지닌 여러 속성 중에서 낯선 사람의 호의를 구입하는 데 유효한 화폐는 고작 몇 가지 뿐이다. 명함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반대로, 평생 아이를 키워냈거나 시를 썼거나 과수원을 경영해 본 사람이라면, 지배적 다수와 반대 방식으로 살았다고 간주되어 과소평가되더라도 별 도리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정도 차별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상당히 많은 사람이 일에 외곬수로 몰두하는 길을 선택한다는 사실도 놀라울 것 없다. 다른 것은 모두 버리고 일에만 집중하는 전략이야말로 상당히 그럴듯해 보인다. 왜냐하면 요즘 세상에서는 물리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경제적 수단을 확보할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번영하는 데 필수인 타인의 관심을 확보하려면 일터에서 성취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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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 사회에서 소외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을 더 자세히 검토해 보면, 사람들이 고독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숫자 문제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수십억 명에 달하는 지금, 낯선 사람에서 말을 걸기는 인구가 더 적었던 예전에 비해 위험하다고 느낀다. 사교성은 인구밀도와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선뜻 말을 거는 것은, 그들을 완전히 외면한다는 선택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베두인족은 자기 천막으로부터 100킬로미터가 넘도록 사막만 드넓게 펼쳐져 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을 따뜻하게 환대하는 심리적 여유가 있다. 반면 도시에 사는 동시대인은 마음 속에 선의와 관용을 품고 있다 해도,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먹고 자고 말다툼하고 성행위하는 수백만 명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티조차 절대로 내서는 안된다. 그래야만 내면을 조금이라도 더 평온하게 지킬 수 있으니까.

더군다나 자신이 타인에게 드러나는 문제도 있다. 통근열차, 인파로 붐비는 거리, 공항 대합실처럼 다른 사람과 만나는 공공장소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겉모습만 드러내도록 설계된 장소다. 따라서 이런 장소에 있다 보면, 원래 사람이란 하나하나가 복잡하고도 귀중한 개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십상이다. 가령 옥스퍼드스트리트를 걸어 보았거나 오헤어 국제공항에서 환승해 본 후에도 인간 본성을 계속 긍정적으로 볼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한편으로는 예전보다 이웃과 더 많이 연결된 느낌이 든다면, 이는 이웃이 동료이기도 해서다. 집(?)이란, 익명인 채로 늦게 돌아와 일찍 떠나기만 하는 기숙사와 꼭 같지 않다. 시골에서 이웃끼리 친숙한 것은 서로 익숙한 대화 상대라서라기보다는, 건초를 베어들이거나 학교 지붕을 얹는 등 공동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은 내밀하고도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서로 튼튼한 연계를 굳히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런 지역 내 생산과 가내 수공업에 인내심을 발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웃끼리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이웃 때문에 지각하거나,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려다 단념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들이 서로 왕래하며 지냈던 것은, 상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또 그 대가로 상대에게 도움을 요청받을 일이 생길 수밖에 없어서다. 전근대 사회에서 자선은 말 그대로 필수였다. 예컨대 그때는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에게서 돈을 빌리거나 떠돌이 거지에게 적선하는 순간을 회피하기가 불가능했다. 보건의료체계, 실업보험, 공공주택정책, 소비조합 같은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병들고 허약하고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나 노숙자가 거리에서 도움을 청한다면, 행인은 정부 기관에서 알아서 문제를 처리하겠거니 생각하고 외면하며 지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과 달리 말이다.

순수한 경제적 시각에서 본다면 지금 사람들은 앞선 사람들보다 훨씬 너그럽다고도 할 만하다. 자기 수입의 절반까지도 공동선을 위하여 내놓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은, 조세제도라는 익명의 대리제도를 통해서 돈을 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경우가 있다 한들, 그것은 우리가 낸 세금이 불필요한 정부 기관을 유지하거나 미사일을 사는 데 쓰인다는 사실에 분개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에 속한 사람 가운데 운이 없는 구성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잘 받지 못한다. 그들이 깨끗한 침대보, 수프, 쉼터, 하루치 인슐린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자기가 낸 세금 덕분인데도 말이다. 시혜자도 수혜자도 "받으세요"(?)라거나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필요를 굳이 느끼지 못한다. 지금 우리의 기부는 복잡다단하게 뒤얽힌 상호의존적 관계에 생명을 주는 일종의 혈액으로 여겨지지도 않고, 수혜자에게 실질적 혜택을 주고 시혜자에게 영적 혜택을 주는 수단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기독교 시대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사람들이 자기 고치에 갇히게 되면서 다른 사람을 상상하는 주된 수단으로 매스미디어(?)가 점차 각광받게 되었는데, 그 결과 자연스레 낯선 사람을 살인자나 사기꾼이나 유아성애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존에 속한 가족이나 계층에 존재하는 인맥으로 검증된 소수 개인만 믿어야 한다는 충동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다 특정한 상황(예컨대 폭설이나 낙뢰 같은 사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밀폐된 고치 밖으로 나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둘러싸이면 십중팔구 깜짝 놀라게 된다. 알고보니 동료 시민은 자기를 토막 살인하거나 자기 아이를 학대하거나 하는 데 놀랄 만큼 관심이 없는 데다, 심지어 성격도 좋고 적극적으로 자기를 도와주려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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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낯선 사람 만나기

1.

현대 사회로 접어들며 우리가 상실힌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상실하여 가장 뼈아픈 것은 공동체 정신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상상한다. 예전만 해도 '이웃의 정'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가차없는 익명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여기서 말하는 '가차없는 익명성'이란 사람들끼리 접촉할 때 경제적 이익이나 사회적 출세나 낭만적 사랑 등 제한적(?)이고 개인적인 목적을 위하는 상태를 말한다. (원문 확인 필요 - 익명성의 정의인가 성격인가)

공동체에 향수를 품는 배경 가운데 하나를 들자면, 곤경에 빠진 사람을 선뜻 돕기 꺼리게 된 현상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걱정하는 사회적 격리의 증상들, 예컨대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지 못하거나 쇼핑을 마치고 무거운 짐을 들고 돌아오는 나이 지긋한 이웃을 도와주지 못하는 등은 오히려 사소하다.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교육`계층`직업이 형성한 일종의 부족끼리 사는 게토에 갇혀 살고, 그 밖에 사는 사람은 일종의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밖에 사는 사람들도 자신이 편하게 어울리며 공감할 만한 집단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한다. 초면인 사람과 공공장소에서 즉흥적으로 시작하는 대화는 일은 특이하고도 유별난 일일 것이다. 나이가 서른을 넘어가면, 친구를 새로 사귀는 것 조차도 놀라운 일이 된다.

공동체 정신이 훼손된 이유를 찾아내려다 보면 듣게 되는 전통적 설명은 19세기에 유럽과 미국에서 발생한 신앙의 개인화가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신에게 공동으로 예배를 올리지 않게 된 바로 그 시기에, 이웃도 무시하기 시작했다고 역사가는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듣다 보면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그 시기 이전에 종교는 무슨 일을 하여 공동체 정신을 드높였을까? 그리고 이런 현실적 의문도 떠오른다. 공동체 정신이 한때 신학적 상부구조와 밀접히 연관되었다면, 세속 사회는 과연 그런 개념 없이도 공동체 정신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 종교에 근거를 두지 않고도 과연 공동체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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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논쟁의 양쪽 진영 가운데 한쪽을 편드는 사람라면 누구든 이 책에서 펴는 전략의 개요를 못마땅해 할 것이다. 종교 지지자라면 자기의 신조를 이토록 세련되지도 포괄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은 방법으로 검토한다는 사실을 일종의 모욕으로 간주할 지도 모른다. 종교란 뷔페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가장 좋아하는 것만 고를 수는 없다고 항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자가 접시에 담긴 음식을 모조리 먹어야 한다고 비합리적으로 고집하다가 몰락한 신앙이 적지 않다. 조토의 프레스코화가 묘사하는 순종을 감상하는 동시에, 수태고지 교리를 건너뛰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를 존중하는 동시에, 불교의 내세 이론을 멀리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문학 애호가가 수많은 고전 중에서 특히 좋아하는 작가 몇 명을 골라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여러 신앙에서 이런저런 요소를 차용하는 것도 결코 죄가 아니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종교는 세계 21대 종교 가운데서 겨우 세 개 뿐이지만, 그 원인이 편애나 조급증(?) 때문은 아니다. 이 책의 비교 대상이 여러 종교들끼리가 아니라 종교 전반과 세속 영역이다 보니 나타난 결과일 뿐이다.

호전적 무신론자가 이 책을 본다면, 종교가 인간의 갈망을 끊임없이 재는 기준인 양 간주하려는 데 격분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여러 종교가 극단적이고도 제도적인 방식으로 불관용을 실현했다는 사실 뿐 아니라, 예술과 과학도 종교에 못지 않게 풍부한 위안과 통찰을 (그것도 더욱 논리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제공한다는 사실까지 지적하리라. 이렇게도 덧붙여 반문할 지 모른다. 종교의 여러 면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털어놓는 사람들이, 다시 말해 동정수태론에 동의하지도 않고 토끼가 붓다로 환생했다는 본생경 내용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종교라는 주제와 왜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 하는가?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종교는 종교 특유의 순수한 개념적 야심을 지녔기 때문에, 또 세속 제도로 시도한 적이 없던 방식으로 세계를 바꿔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관심을 가질 가치가 확실히 있다고 말이다. 종교는 윤리학과 형이상학 이론을 교육`패션`정치`여행`숙박업`입교의례`출판`미술`건축 분야의 실제 참여를 조합했다. (이러한 관심 범위에만 비교하더라도 세속에서 가장 위대했고 가장 영향력 있던 운동이나 개인의 성취조차 무색해질 것이다) 이처럼 이제껏 지구상에서 목격된 교육적이고 지적인 운동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례를 본다면, 관념의 전파와 영향력에 관심을 둔 사람이 매료되지 않을 리 없다.

 

5.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몇 가지 특정 종교를 정당화하려 하지 않는다. 종교마다 저마다 옹호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 책에서는 종교 생활의 여러 측면 중에서도 세속 사회의 여러 문제에 적용하여 효과를 거둘 만한 개념을 검토하려 한다. 그리고 종교 특유의 독단적 측면을 제거함으로써, 가뜩이나 회의적인 현대인이 골치 아픈 이 행성에서 유한한 생애 동안 마주치는 재난과 슬픔에 시의적절하게 위안을 주는 부분을 찾아내려 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 진실해 보이지 않는 모든 것으로부터, 여전히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슬기로운 것을 구해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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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는 철저한 무신론 가정에서 자랐다. 세속적 유대인인 부모님이 생각하기에 신앙이란 산타클로스와 관련된 그 어떤 것 정도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누이동생을 울리고 만 적도 있다. 신이 지구를 떠났더라도 우주 어딘가에는 살고 있을 거라는 순수한 생각을 동생에게서 몰아내려다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 누이는 고작 여덟 살이었다. 부모님은 자기와 사귀는 집단에서 종교적 감상을 은밀히 품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마치 퇴행성 질환을 진단받은 사람을 보듯 측은한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그를 다시는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부모님의 태도에 강한 영향을 받았지만, 20대 중반에 신앙 문제로 위기를 겪었다. 바흐의 칸타타를 들으며 비롯된 의구심은 조반니 벨리니의 성모 그림을 보며 더욱 발전했고 禪 건축에 입문하면서 점점 더 나를 압도했다. 그러다 몇 해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당신은 런던 북서부 윌스든 소재 유대인 묘지에 히브리어를 새긴 비석 아래에 누우셨다. 이보다 세속적인 장례를 직접 준비하지는 못하셨기 때문이다) 비로소 어린 시절에 주입당한 교조적 원칙을 모호하게나마 스스로 어떻게 느꼈는지 직시하게 되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만은 내 일생에 한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초자연적 사상에 굴복하지 않고도 종교와 관계를 맺는 방법이 있으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간단히 해방감을 느꼈다. 조금 더 추상적으로(?) 설명하자면, 아버지에 관한 애틋한 추억을 망치지 않고도 교부들을 생각하는 방법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가령 내가 내세나 천국의 거주민을 다룬 이론에 계속 저항감을 느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여러 신앙에 관련된 음악, 건물, 기도, 의식, 축제, 성묘(?), 순례, 공동 식사(?), 채색 필사본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깨달았다.

세속 사회는 신앙의 여러 관습과 주제를 상실함으로써 불공평할 정도로(?) 빈곤해졌다. 보통 무신론자라면 그런 관습이나 주제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말을 유용하게 인용하자면, 그런 것들은 '종교의 악취'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덕'이라는 단어를 점차 꺼리게 되었고, 설교를 듣는다는 상상만 해도 격분한다. 우리는 예술이 무엇인가를 고양한다는 생각이나, 예술이 윤리적 사명을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났다. 우리는 순례를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신전을 지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감사를 세련되게 표하는 절차가 없다. 고상한 사람에게는 자기계발 서적을 읽는다는 생각마저도 터무니없다. 우리는 정신을 훈련하는 일을 거부한다. 낯선 사람과 함께 노래하는 일은 드물다. 예컨대 비물질적 신이라는 기묘한 개념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위안을 주거나 섬세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매력적인 의식을 그냥 포기해 버리는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것을 세속 사회에서 찾아다니느라 고생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불쾌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렇게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한 결과, 우리는 원래 인류 모두의 소유라고 할 만한 어떤 것, 그리고 세속적 영역에서 다시 이용한다고 해서 딱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는 어떤 것을 종교가 종교에서만 경험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도록 허용한 셈이다. 초기 기독교만 해도 다른 종교의 좋은 발상을 능숙하게 재사용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수없이 많은 이교 관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현대 무신론자조차도 그런 관습이 처음부터 기독교의 관습이었다고 오해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을 정도다. 예컨대 신흥 종교였던 시절의 기독교는 동지 축제를 받아들이고 크리스마스로 포장했다. 또 철학적 공동체의 생활을 다룬 에피쿠로스주의의 이상을 흡수하고 변형한 것이 오늘날 말하는 수도원주의다. 로마 제국이 폐허로 변할 때, 한때 이교의 영웅과 주제에 바쳤던 신전이 껍데기만 남자 기독교가 그 안을 재빨리 파고들었다.

무신론자가 직면한 문제는, 종교적 식민화 과정을 역전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종교의 관념과 인식을, (이를 소유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종교 제도로부터 분리하느냐는 문제다. 예컨대 크리스마스를 이루는 훌륭한 요소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작 그리스도의 탄생과 아무 관계가 없다. 즉 크리스마스와 관계된 주제는 공동체, 축제, 갱생인데, 이는 기독교가 영향을 끼치기 수백 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에 직결된 필요 요소(?)조차도 일찍부터 종교 특유의 색조에서 벗어날 채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여러 신앙을 독해해 보려 한다. 주된 대상은 기독교이고, 그보다는 덜하더라도 유대교와 불교도 독해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세속적 삶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통찰을, 특히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나 정신적`신체적 고통이라는 문제에 관한 통찰을 찾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의 근본 논지는 세속주의가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치게 세속화한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관념을 벗어던지던 와중에, 매우 유용하고 매력적인 여러 요소조차도 포기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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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종교를 두고 던질 만한 질문 중에 재미도 없고 쓸모도 없기로 제일이라면, 그 종교가 '진실'하냐고 묻는 것이다. 여기서 '진실하냐'는 말은, 그 종교가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왔느냐, 그리고 예언자와 천사가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관장하느냐는 의미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독자를 잃어버릴 지도 모르지만, 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련다. "하늘에서 받았느냐는 기준에 댄다면 진실한 종교는 하나도 없다"고. 나는 기적, 영혼, 불타는 덤불 같은 이야기를 도저히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리고 몬테풀치아노의 성 아그네스 같이 비범한 사람들의 위업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 (전설에 따르면 성 아그네스는 기도하는 동안 땅에서 반 미터나 떠올랐고 죽은 아이를 되살리기도 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토스카나 남부에서 천사에게 업혀 하늘나라로 올라왔다는 전설도 있다.)

 

2. 신이 부재함을 증명하는 것은 무신론자에게 일종의 오락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냉정하게 종교를 비판하여 종교인이 아둔함을 가차없고 치밀하게 세상에 드러내는 데서 큰 기쁨을 찾고, 자신의 적이 온전히 바보거나 미쳤다는 사실을 충분히 드러냈다고 느껴서야 공격을 멈춘다.

그런 과제도 나름대로 만족감을 주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쟁점은, 신이 존재하느냐 부재하느냐가 아니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결론지은 사람이 그 결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이 책의 전제는, 무신론을 계속 철저히 지키는 사람도 때로는 종교가 유용하고 흥미로우며 위안을 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종교에 얽힌 관념과 실천 가운데서도 세속으로 끌어올 부분이 있다는 흥미로운 가능성도 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이나 불교의 팔정도 같은 교리에 냉담한 사람이라도, 종교가 복음을 전하고 도덕을 장려하며 공동체 정신을 강화하고 미술과 건축을 발전시키며 여행에 영감을 불어넣고 정신을 단련하며 봄의 아름다움에 감사하게 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둘 수 있다. 세상에는 종교와 세속을 가리지 않고 갖가지 근본주의자가 출몰하지만, 종교적 신념에 대한 반대와 종교적 제의 및 개념에 대한 선별적 경의 사이에서 일종의 균형을 잡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

'종교란 하늘나라가 인간에게 내려준 것'이거나 '완전히 엉터리에 불과한 것'이라는 이분법 사고방식을 버린다면 문제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그렇게 된다면 종교가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 발명품이 지금도 존재하는 (그리고 세속의 어떤 기술로도 해결할 수 없던) 두 가지 필요를 충족하려고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두 가지 필요 중 첫째는, 비록 우리 몸 속에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이 깊이 뿌리박혀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직업에서 실패하고 인간관계가 꼬이고 가족이 죽고 자신이 늙고 죽는 등 인간의 나약함이 불러일으키는 끔찍한 고통에 대처해야 하는 필요성이다. 정말 신은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던 여러 가지 절박한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는 지금도 해결책이 필요하다. 마태복음 제14장에 나오는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 이야기가 과학적으로 진실이 아니라고 누군가가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해결책 말이다.

현대 무신론의 오류는 어떤 신앙의 핵심 교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더라도 여전히 타당한 측면이 무척 많다는 사실을 간과한 데 있다. 사람이 종교에 굴복하거나 종교를 모독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나면, 종교라는 것이 갖가지 정교한 개념을 담은 저장고라는 사실을 얼마든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세속에서 마주치는 질환 가운데서도 가장 끈질기고 대책도 없는 것 중 몇 가지를 완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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