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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3.13 외식의 품격, 당신에게 말을 건다
  2. 2015.12.08 라틴어 입문
  3. 2015.11.23 苦戰


내게 번역이란 독서라는 제1취미를 가장 집요하고 심도있게 즐기는 수단이자, 취미를 하는데 돈까지 받는 경로다.


여기서 취미~부업이 AND 조건임을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돈이 아쉬워서 하는 일이 아닌 이상, 나는 하기 싫은 책을 번역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 데뷔를 하지 못했거나 일거리가 취미 관점에서도 지나치게 들어오지 않는다면 또 다른 얘기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번역한 책 중 하기 싫은 책은 없었다. (첨언하자면, 능력의 부족 때문에 지금 다시 맡으라면 고사해야 할 듯한 책은 한 권 있다. 밝히지는 않겠다.) 한편 취미기는 한데, 그럼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좋은 책이 있는데 재능기부 어떠냐'라고 한다면 단번에 '기부할 재능이 없다'고 자르겠다. 재능도 없거니와, 1주일 내내 아이들 재우고 난 밤 시간 + 주말 한나절(보통 오전)을 취미에 떳떳하고 뻔뻔하게 바치려면 명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두 가지를 한 번에 충족하는 것은 아주 좋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있는 것이, 단순 권수로만 따진 독서량은 번역 시작한 이후 줄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석달 기한을 받는 보통 책 한 권의 초벌번역만 빡빡하게 한달 반이 걸리고, 이걸 세 번 교정하는 데 조금 여유있게 한달이 걸린다고 치면 다음 번 일거리가 들어올 때까지 남는 시간은 두 주 뿐이다. 이 두 주를 만약 그냥 지나간다, 그리고 1년에 네 권을 한다 하면 여유있게 보내는 주는 1년 합쳐 두 달 뿐이다. 12개월이 2개월로 줄어드는데 100% 취미독서량에 영향이 없을리 없다. 게다가 작년 9월부터 시작한 <Money Changes Everything>은 분량도 보통 책 두 권 정도에다, 쐐기문자부터 시작되는 (금융)역사서라 자료조사에도 시간이 많이 들었다.


물론 지난 6개월 동안 읽은 자료 양과, 이를 이해한 질을 보통 취미독서와 비교하면 오히려 압도적이겠으나 어쨌든 제대로 읽은 책을 들라고 한다면 지난 9월에 읽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후 2월에서야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을 적을 수 있다. 이야기가 산으로 가지 않도록, 두 책 모두 매우 좋은 책이라고 언급해 두고 감상은 다음에 남기자. (정말 좋은 책이다.) 그 사이 몇 권을 지나, 3월 초에 주문한 책이 <춘추전국 이야기> 10권과 저 두 권이다. <춘추전국 이야기> 역시 매우 좋은 책이라고 언급하고 지나가자. 다만 분량이 하루에 읽을 책은 아닌 데 비하여, 저 두 권은 명목상 이틀, 사실상 하루만에 읽었다. 지난 반 년 동안 금융과 역사에 찌든 내 독서뇌는, 무언가 완전히 다른 주제에 굉장히 굶주려 있었던 듯하다.


우선 <당신에게 말을 건다>는 지방(그것도 부산이나 대전 같은 광역시조차 아니다!) 서점을 대를 이어 경영하는 젊은 경영자의 전략이 엿보이는 책일 것 같아 카트에 넣었는데, 막상 읽고 나니 가족애와 소소한 애환이 더욱 깊이 와닿았다. 의도하지 않은 내용이 오히려 좋았는데, 생각하면 이 책 자체가 내가 생각했던 전략을 (의도했든 아니든) 훌륭하게 구현하는 수단일 것이다. 속초에 가게 된다면 이 책을 들고 서점을 방문하여 사인을 받고, 다른 책 한 권을 산 후 닭강정을 먹겠다. (<외식의 품격> 저자라면 이 닭강정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겠다.) 이 책은 동아서점 뿐 아니라 대학교 때 몇 번 갔던 (내게 특별히 나쁜 도시도 좋은 도시도 아니었던) 속초의 매력까지 높인다.


<외식의 품격>은 저자의 블로그를 읽고 깊이 공감하여 샀다. 내 생각에, 저자가 방문한 후 비난을 피할 만한 집은 거의, 정말 거의 없다. 책을 읽고 나면 한국에는 원류를 제대로 연구하지도 않은 채 '입맛은 주관적이다'와 '우리 식'을 내세우고, 한편 터무니없는 값을 매기는 음식점밖에 없는 듯하다. 그래서 서평에는 건방지다느니 하는 얘기도 올라온다. 나라면 지식도 미각도 (어쩌면 다행히) 없는데다 분쟁도 꺼리는 성격상 저자처럼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저자에게 감사한다. 나 같이 싸울 능력도 의지도 없는 사람이 음식을 보는 관점을 바꾸고, 언제가 될 지는 몰라도 조금이라도 나은 외식을 즐기게 될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높아진다면 이는 저자와 같은 사람 덕분이다.


두 책을 산 이유 중에는 후원 목적도 있다. (아마 블로그에서였을텐데) 폐업하는 가게를 보고 '비싸서 잘 가지는 못했던 가게지만 없어진다니 아쉽네요'라는 평에 분노하는 <외식의 품격> 저자에 나는 우선 공감한다. 더하여, 저자의 의견과 상통하리라 생각하지만 확신은 없으니 순수한 내 생각임을 전제하고 쓴다. 상품의 질에 비하여, 아니 품질 값을 하지만 절대액이 비싸 사지 않는다면, 품목 자체가 글러먹어서든 생산자의 가치평가가 잘못되어서든 현 상태에서 그 잠재 소비자에게 그 상품은 존재가치가 없다.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가치를 지불해야 한다. 그렇게 모인 총 가치가 상품의 생산비용(기회비용 등을 포함한다)과 같다면 그것은 계속 남을 것이다. 내게 두 저자의 사고방식과 행동 이력에는 책값을 뛰어넘는 가치가 있었다. 사 놓기만 하고 도저히 읽지 못한 <금요일엔 돌아오렴>과 <다시 봄이 올 거예요>가 그렇듯. 그래서 나는 책값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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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TUNC AU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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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입문

독서 2015. 12. 8. 01:03

5월 23일에 읽기 시작한 이 책을 오늘 드디어 다 읽었다. 여기서 읽었다 함은 말 그대로 지문을 소리내서 읽었다는 얘기다.

이 책의 부제는 'Latin without tears'다. 라틴어 원문과 단어설명, 한국어 대역이 91개 장에 걸쳐 제시되어 있고, 라틴어의 장벽인 문법 설명은 비교적 간략하게만 나온다. 지문을 읽다 보면 마치 라틴어를 이해하게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해준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단점이라면 군데군데 보이는 오탈자다. 8월에 만원 더 비싼 가격으로 나온 개정판에서는 고쳤겠거니 한다.

생각해보면 라틴어로 말하고 듣고 쓸 일은 절대 없을테고 저엉말 잘 해 봤자 읽기나 할텐데, 내가 고고학자도 아니고 번역판이 최소한 영어로라도 나와 있는 고전을 읽는다 치면 오독한다고 해서 나 말고 딱히 피해 볼 사람은 없다. 그러니 괜히 격 변화를 외워가며 골치를 썩이느니 대충 맛만 보는 정도로 만족하려 한다.

물론 맛만 본다는 목표에는 문제가 조금 있었다. 첫째, 뜻도 모르고 노래를 부르고 있자니 맛만 보는 데 5월 후반부터 12월 초까지 반년이 넘게 걸렸다. 맘먹고 소리내 읽기만 했으면 한 25시간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하는데, 내가 또 그럴 수 있을 만큼 한가하진 않다. (그러나 라틴어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은 가끔 한가하다) 둘째, 맛만 볼거면 대체 왜 쓸데도 없는 라틴어를 쓸데도 없는 만큼만 배우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냥 산이 있어서 오른 것일 뿐이다.

2.5만원짜리 책 사서 반년동안 가지고 놀았으면 일단 돈을 버린 것은 아니라 치고, 당분간 책장에서 묵혀두다 생각날 때 다시 읽어볼까 한다. 여태까지는 자비로운 저자님들 덕분에 마주친 적 없는 스페인어(등 로망스어) 인용문을 앞으로도 마주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에 스페인어 역시 언젠가 배워보고 싶은 언어인데, 그 때 라틴어 '경험'('학습'이라고는 양심상 하지 못하겠다)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Posted by TUNC AU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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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戰

독서 2015. 11. 23. 23:38

'고전을 읽어야 한다' 좋다.

'고전은 머리가 깨질 정도로 어렵지만 그래도 읽어야 한다. 부자가 될 수단으로써' 여기는 미지일 뿐 아니라 동의하기도 힘든 부분이다. 오히려 첫 번째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내가 뭔가 잘못 알고 동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하는.

'고전은 머리가 깨질 정도로 어렵지만 그래도 읽어야 한다' 두 번째 문장의 가지를 쳐낸 이 문장에는 사실 제일 동의하기 힘들다.


몇 년 전부터 고전 읽기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유명세를 얻어 간 저술가가 있다. 그 외 이와 독립된 어떤 저작 또는 주장으로 유명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는 번역을 하면서 새삼 내 독서 경력이 일천함을 깨닫고 이를 한 방에 해결할 손쉽고도 간편하며 수고가 들지 않는 방법을 찾다, 고전을 읽으면 파생형인 비고전은 안 읽어도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한 마디로 독서량을 훨씬 줄여줄 수 있는 해결책이 고전 읽기가 아닌가 하는 가설에 이르렀다.

물론 중간 검증 결과는 참혹했다. 내가 평생 읽을 수 있는 (정확히 말하자면 곱씹고 갈무리하는 과정을 다 제외하고 그냥 훑어 읽는) 양이 10 정도라고 치고 전 세계 모든 책이 한 1조 정도라고 치면, 고전도 한 100 정도는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고전 중 1/10을 읽을 수 있다는 얘기도 아니다. 그냥 내 능력을 벗어나는 양이라는 얘기이므로 저 가능해 보이는 수치가 눈에 거슬린다면 로그 스케일로 환산하여 생각해도 좋다)

하여간, 고전을 읽으려면 우선 무엇이 고전인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유명한 고전 목록으로는 시카고 대학 선정 고전선을 빼놓을 수 없겠지만 부업상(직업상이 아니다. 아직은) 원문 의미 못지 않게 한국어 표현이 중요한 내겐 한국에서 책을 낸 출판사까지 표시된 목록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저술가가 쓴 책의 부록에서 도움을 크게 받았다. 목록 자체에 대한 개인적 감상도 물론 있으나 읽지 않은 책이 많아 그건 이후에 쓴다.

하지만 그 책의 본문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매우 명확하기 때문에, 그리고 저자도 딱히 내 동의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쓸 필요도 없다. 오히려 내가 동의하기 힘든 부분은 '고전은 머리가 깨질 정도로, 읽다 비명을 지를 정도로 어렵다. 수없이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난해하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읽으면 머리가 좋아진다'정도로 요약 가능한 내용이다.

나는 내가 읽어 온 책을 모두 100% 이해했을까? 100%라 함은 줄거리인가, 저자가 염두에 두고 쓴 모든 함의인가, 아니면 저자마저 의식하지 못했지만 독자는 매우 명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상징까지인가? 내 생각에 어떤 책을 읽기 전과 읽고 난 후 약간이라도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 책은 읽힌 것이다. 모든 단어와 문장의 함의까지 (그러려면 당연히 그 책에 영향을 끼친 전 세대의 책의 내용과 함의까지, 다시 그 전 세대로...) 읽어내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군주론>은 고전인가? 그렇지 않다고 감히 주장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읽어내야 군주론을 '읽은' 것인가? 모든 주석을 꼼꼼히 읽고 해설서까지 여러 권에다, 군주론에 영향을 주었거나 군주론에서 영향을 받은 책의 계보와 내용까지 꿰어야 군주론을 감히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좋다. 한 번 스치듯 읽은 사람과 이처럼 책이 닳을 때까지 읽은 사람의 이해 수준은 크게 차이가 날 법 하다. 그리고 일천한 내 경험에 따르면 군주론은 그냥 가볍게 넘겨가며 읽어도 정치라는 주제와 비유라는 기교 면에서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다.

저자가 드는 사례 대부분이 내게는 불편했다. 손자병법을 이해했다고 하려면 <전쟁론>을, <군사학 논고>를, 그 외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병서를 모두 읽고 이해해야 할까? <국가론>을,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었다고 하려면 정말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까지 읽어야 할까? 물론 그럴 수 있다면 좋다. 그러나 위 책들의 저자가 의도한 내용을 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게다가 전부 다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나는 손자병법과 국가론과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누군가가 '책에 무슨 내용이 나오던가요' 묻는다면 '직접 읽어보세요'라고밖에 말 못한다. 하지만 생각 외로 딱딱하지 않은 책이라는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고전은 (번역이 제대로 되어 있다면) 다양한 독자가 자기 수준만큼 얻어갈 수 있는 책이고, 또 자기가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기며 읽어가면 되는 책이다. 읽기도 전에 '엄청나게 어렵지만 반드시 읽어야 한다!'라고 겁부터 먹으면서 읽을 필요가 없단 얘기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윽박지르는 그 저술가의 의도가 궁금하다.

Posted by TUNC AU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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