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공부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p.34~

TUNC AUTEM 2021. 8. 22. 22:59

현대와 같은 세속적 시대에서는 가족 사랑과 공동체 정신이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 정치인이 사회 개혁을 열망한다고 말할 때 가족을 전형적 상징으로 예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점에서 더 현명하고 덜 감상적인 편은 정치인이 아니라 기독교다. 기독교는 가족에 집착하다 보면 결국 애정의 범위가 좁아지게 되고, 또 개개인과 온 인류의 연계를 이해한다는 더욱 폭넓은 문제를 고민하지 못하게 된다고 인정한 바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러한 공동체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세속 지위에 대한 집착을 모두 버리라고 요청한다. 권력과 금전이라는 외적 속성보다 사랑과 자비라는 내적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군주와 거물을 설복시켜 목수 한 사람의 조각상 앞에 무릎을 꿇고, 또 농부와 청소부와 마부의 발을 손수 씻기도록 만들기까지 매우 온건한 신학 논증 말고는 어떠한 강압도 동원하지 않은 것은 기독교가 이룬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교회는 그저 세속적 성공이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세속적 성공 없이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르쳐주었다. 교회는 애초에 사람들이 왜 지위를 얻으려고 노력하는지 정확히 간파하고, 계층과 직위에 대한 집착을 기꺼이 포기할 만한 환경을 교회 안에 만든 셈이다. 교회가 제대로 이해한 대로, 사람들이 저마다 권세를 얻으려고 분투하는 것은 지위가 낮을 때 당할 만한 일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위엄을 잃고, 남에게 보호해 달라고 기대며, 친구 하나 없는 신세가 되고, 거칠고 절망스런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을 차례차례 바로잡아주는 것이 미사가 주는 장점이다. 미사를 올리는 건물은 대체로 화려하다. 그 건물이 원래는 인간이 평등함을 기억하라는 데 바친 건물일지라도, 아름답기로는 웬만한 궁전을 뛰어넘기까지 할 정도다. 마시에 동석한 사람들마저도 매력적이다.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 불행인 상황일 때, 다시 말해 '평범한 사람'이 '진부하고 우울한 사람'과 동의어인 상황일 때라면, 명예와 권세를 열망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대성당에 모여 대영광송(Gloria in Excelsis)을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에 교인들이 느끼는 '우리'는, 저 바깥 어느 쇼핑몰이나 별볼일 없는 번화가에서 마주치는 군중과 완전히 차원이 다르기 마련이다. 낯선 사람끼리 모여 별이 총총 박힌 궁륭을 올려다보며 한목소리로

"주여, 오소서, 저희들 가운데 사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저희에게 힘을 주소서"(?출처)

라고 낭송하다보면, 문득 인간이라는 존재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사라진다.

그 결과, 이제부터는 일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말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껏 경력으로 얻으려던 존경과 안정을 가톨릭 공동체 안에서 이미 이루고 있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따뜻하고 인심 좋은 공동체는 호의를 베풀면서도 대가로 세속에서들 원하는 조건을 요구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