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p.13~
3. 나는 철저한 무신론 가정에서 자랐다. 세속적 유대인인 부모님이 생각하기에 신앙이란 산타클로스와 관련된 그 어떤 것 정도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누이동생을 울리고 만 적도 있다. 신이 지구를 떠났더라도 우주 어딘가에는 살고 있을 거라는 순수한 생각을 동생에게서 몰아내려다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 누이는 고작 여덟 살이었다. 부모님은 자기와 사귀는 집단에서 종교적 감상을 은밀히 품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마치 퇴행성 질환을 진단받은 사람을 보듯 측은한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그를 다시는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부모님의 태도에 강한 영향을 받았지만, 20대 중반에 신앙 문제로 위기를 겪었다. 바흐의 칸타타를 들으며 비롯된 의구심은 조반니 벨리니의 성모 그림을 보며 더욱 발전했고 禪 건축에 입문하면서 점점 더 나를 압도했다. 그러다 몇 해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당신은 런던 북서부 윌스든 소재 유대인 묘지에 히브리어를 새긴 비석 아래에 누우셨다. 이보다 세속적인 장례를 직접 준비하지는 못하셨기 때문이다) 비로소 어린 시절에 주입당한 교조적 원칙을 모호하게나마 스스로 어떻게 느꼈는지 직시하게 되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만은 내 일생에 한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초자연적 사상에 굴복하지 않고도 종교와 관계를 맺는 방법이 있으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간단히 해방감을 느꼈다. 조금 더 추상적으로(?) 설명하자면, 아버지에 관한 애틋한 추억을 망치지 않고도 교부들을 생각하는 방법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가령 내가 내세나 천국의 거주민을 다룬 이론에 계속 저항감을 느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여러 신앙에 관련된 음악, 건물, 기도, 의식, 축제, 성묘(?), 순례, 공동 식사(?), 채색 필사본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깨달았다.
세속 사회는 신앙의 여러 관습과 주제를 상실함으로써 불공평할 정도로(?) 빈곤해졌다. 보통 무신론자라면 그런 관습이나 주제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말을 유용하게 인용하자면, 그런 것들은 '종교의 악취'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덕'이라는 단어를 점차 꺼리게 되었고, 설교를 듣는다는 상상만 해도 격분한다. 우리는 예술이 무엇인가를 고양한다는 생각이나, 예술이 윤리적 사명을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났다. 우리는 순례를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신전을 지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감사를 세련되게 표하는 절차가 없다. 고상한 사람에게는 자기계발 서적을 읽는다는 생각마저도 터무니없다. 우리는 정신을 훈련하는 일을 거부한다. 낯선 사람과 함께 노래하는 일은 드물다. 예컨대 비물질적 신이라는 기묘한 개념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위안을 주거나 섬세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매력적인 의식을 그냥 포기해 버리는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것을 세속 사회에서 찾아다니느라 고생하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불쾌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렇게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한 결과, 우리는 원래 인류 모두의 소유라고 할 만한 어떤 것, 그리고 세속적 영역에서 다시 이용한다고 해서 딱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는 어떤 것을 종교가 종교에서만 경험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도록 허용한 셈이다. 초기 기독교만 해도 다른 종교의 좋은 발상을 능숙하게 재사용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수없이 많은 이교 관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현대 무신론자조차도 그런 관습이 처음부터 기독교의 관습이었다고 오해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을 정도다. 예컨대 신흥 종교였던 시절의 기독교는 동지 축제를 받아들이고 크리스마스로 포장했다. 또 철학적 공동체의 생활을 다룬 에피쿠로스주의의 이상을 흡수하고 변형한 것이 오늘날 말하는 수도원주의다. 로마 제국이 폐허로 변할 때, 한때 이교의 영웅과 주제에 바쳤던 신전이 껍데기만 남자 기독교가 그 안을 재빨리 파고들었다.
무신론자가 직면한 문제는, 종교적 식민화 과정을 역전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종교의 관념과 인식을, (이를 소유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종교 제도로부터 분리하느냐는 문제다. 예컨대 크리스마스를 이루는 훌륭한 요소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작 그리스도의 탄생과 아무 관계가 없다. 즉 크리스마스와 관계된 주제는 공동체, 축제, 갱생인데, 이는 기독교가 영향을 끼치기 수백 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에 직결된 필요 요소(?)조차도 일찍부터 종교 특유의 색조에서 벗어날 채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여러 신앙을 독해해 보려 한다. 주된 대상은 기독교이고, 그보다는 덜하더라도 유대교와 불교도 독해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세속적 삶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통찰을, 특히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나 정신적`신체적 고통이라는 문제에 관한 통찰을 찾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의 근본 논지는 세속주의가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치게 세속화한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관념을 벗어던지던 와중에, 매우 유용하고 매력적인 여러 요소조차도 포기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