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ourable Schoolboy> - 나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명작이라고 하니 언젠가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일단 분량 때문에 손에 잡기 힘들고, 굳게 마음먹고 책을 펼쳐도 도무지 진척되지 않는 줄거리에 러시아 고유명사의 향연에 결국 몇 번이나 덮게 되는 고전. 그러다 큰 병에라도 걸려 몇 주 몇 달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을 때, 사 놓거나 읽어 볼 만하다는 책은 이미 다 읽어버려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을 때에야 손을 뻗게 된다는 악몽같은 책.
이상은 벌써 20년도 넘은 입시생 때 학원 강사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묘사한 대목이다. (정작 그 과목이 국어나 문학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얼마나 인상이 깊었으면 강의와 아무런 맥락도 없이 나왔을 말이 세월을 이겨내고 강사의 표정과 함께 떠오를 정도다.
그리고 오늘 나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끝까지 읽었다. 본작이 아니라, 존 르카레의 <Honourable Schoolboy>를.
반 년 전 여행 때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를 읽고, 조금 뒤에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보고 나서 나는 <TTSS> 캐스팅을 유지한 후속작으로 <Smiley's People>이 나올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극장에서 보겠다는 목표 1, 영화가 나오기 전에 원작을 읽겠다는 목표 2, 그리고 <The Call from the Dead>부터 <SP>까지 스마일리 시리즈를 순서대로 읽겠다는 목표 3을 (그리고 읽어야 하는 책이라면 번역본으로, 영문판이 원서고 재미 때문에 읽는다면 원서로 읽는다는 원칙 상 모두 원서로 읽겠다는 기본 목표0까지) 충족하기 위해, 한 권만 배송해도 전 세계 무료인 Bookdepository (왜 갑자기 광고비도 안 받는 광고 분위기..)에서 다섯 권을 한 번에 주문했다. (<The Looking Glass War>는 일단 영화와 관계 없을테니 제외했다)
첩보소설을 기대했더니 추리소설에 가까웠던 앞 두 권, 내용과 암시는 어찌됐든 앉아있으면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나는 영화는 책과 다르다는 깨달음을 준 <TTSS>. 그리고 <HS>는 옛날 BBC 드라마로도, 이번 영화로도 영상화를 검토만 하다 결국 건너뛰기로 했다는 책이다. 하지만 시리즈에서 그렇게 건너 뛰는 책이 있다면, 후속작에서 어느 정도 이야기를 다루지 않을까, 그렇다면 읽어야 영화도 여러 내용을 빠짐없이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SP>를 보기 전에 <HS>를 먼저 보기로 했다.
일단 분량이 압도한다. 팸플릿 같던 첫 두 권, 분량으로 여전히 부담 없어 보이던 <추운 스파이>를 쓸 때까지 저자는 작가를 취미로 하던 양반이었는데, 세 번째 작품이 대성공하면서 회사를 때려치고 전업 작가가 되는 한편, 가용 시간이 급증함에 따라 작품 분량도 급증하였다 한다. 그래도 <LGW>는 288페이지까지만 늘어났지만, 급기야 <TTSS>는 416페이지로... 한국어책도 400페이지 넘어가면 분량 부담이 없다고 하기 힘든데, <TTSS>는 냉전의 음울함과 첩보전의 신경쇠약을 문체와 내용 뿐 아니라 분량에서부터 구현했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HS>는 688페이지 짜리다.
이 책을 처음 펴고 다 읽는 데 다섯 달이 걸렸다. 물론 5개월 동안 이 책만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그랬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대단한 일이지만.) 첫 두세 챕터 읽다 던져두고, 다시 1장부터 읽고 하기를 세 번은 했다. 한 100페이지 넘어가니 그 동안 읽은 노력이 아까워 '정석 공부할 때마다 행렬만 열심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이를 악물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여름 여행 때는 10시쯤부터 가족이 자느라 호텔 방 불을 끄면 로비로 내려와 한두 장씩 읽어냈고 (그 동안 책 보다가 조는 아름답지 못한 장면도 연출했다. 방에서 잠이나 자지 왜 1시간 넘게 로비 소파에 앉아 책 읽는 척 하며 불편하게 하는지 귀찮아하셨을 직원분들 죄송) 400페이지 넘어가면서는 첫째 눈높이 풀듯 자기 전에 한 챕터 씩 풀..아니 읽다가, 오늘은 아예 이놈의 책 끝을 내겠다는 마음으로 말복 한낮에 감히 집 밖으로 나와 카페에 죽치고 앉았다.
나중에 어떻게 평가받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최소한 지금 이 책이 <형제들>처럼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은 것도 아니고, <TTSS>나 <SP>처럼 영화화된 유명한 소설도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렇게 기록을 남겨놓는 것은 누가 안 시켰는데 거의 700페이지짜리 원서를 읽어 낸 자랑스러움에서다. (번역가는 원서 읽기가 더 편하지 않나요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내 경우에는 '오히려 그렇지 못해서' 내지 '이해 못하는 데 약이 올라서' 번역을 시작한 데 가깝다. 그리고 안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대부분은 나와 비슷하거나, 최소한 '영어 책 당연히 읽기 어렵지'인 듯)
그런데 신기한 것이, 더 짧은 <TTSS>는 당분간 다시 읽을 마음이 없는데 <HS>는 '언제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라는 대체재가 있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TTSS>의 칙칙하고 끈적한 분위기는 영화를 보나 책을 보나 어느 정도 비슷했으니 빨리감기의 도움을 받아 영화를 보는 편이 간편하고 시간도 절약된다. 반면 <HS>는 다른 방법이 없다. 또 영화를 비롯해 다른 정보원천이 있는 <TTSS>와 달리, <HS>는 덜 유명한 탓에 이 외에 내용을 알 방법이 없다. 여지껏 여러 내용에서 암시했듯, 이번 독서의 목표는 완독이지 정독이 아니다보니 안구만 움직이고 뇌는 움직이지 않은 부분이 반 이상일지도 모른다. (좀 심해 보이지만, 잠재의식에는 남아 있을 거라고 위안한다) 기본 줄거리 말고는 내용을 반이나 이해했을까? 그러다보니 추억보정으로 '돌이켜보니 재미있는 것 같았어'하는 생각이 벌써 들어 한편으로 소름끼친다.
그리고 다음 작인 <SP>는 다시 간소하게(?) 432페이지로 줄어든다. 열탕에서 온탕 갈때와 냉탕에서 온탕 갈때 다르듯, 책이 얇아보이기까지 한다. 심지어 <HS> 다 읽은 오늘 슬쩍 집어들고 한 페이지 읽기까지 했다. 바로 덮었지만.. 뜬금없는 마무리지만, 르카레 선생께서 이제껏 부업 작가로 남았다면 지구의 나무는 살리고 독자의 시간은 절약하며 이야기의 밀도는 높아지는 긍정적 효과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킴 필비 개자식.. 공산주의 정보기관의 진정한 해악) 물론 공평하게 말하자면 내용이 아니라 문체와 분위기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고, 지금 나온 스마일리 시리즈나 다 완결되었을지조차 의문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