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종말, 계속
올해 6월 말 이후 오랜만에 샘플 작업 중이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비록 정식 번역 작업은 아니지만 충실감을 느껴본다. 방향을 어디로 잡고 무엇을 하든 매일매일 몸만 열심히 움직이면 제대로 사는 거라는 맹목적 근면 지상주의의 혐의가 엿보이기는 한다. 어쨌든 표면적으로 내세울 만한 근거는, 원래 그래서는 안 되지만 무산노동자로서 자투리가 될 수밖에 없는 시간을 그나마 유용하게 - 독서와 어학학습, 그리고 (샘플의 경우 선정된다면) 시간 환금까지 동시에 달성하는 방식으로 - 보내는 방법이라는 데 있다. 지난 3년을 통틀어 몸은 가장 분주하고 마음은 가장 번잡했던 4개월을 보냈지만, 돌이켜 보면 역시 '하려면 못 할 것은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해야 했느냐'고 물어본다면, '하는 이상으로 가치있게 보냈다'고 말할 수 있어 다행이기도 하다.
이렇게 새 책에 착수할 지도 모르는 상태인데, 전공이 딱 들어맞지는 않는 이번 샘플에 덜컥 지원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주 전에 받은 연락이다. <Txt me>를 납품받은 출판사가 검토 결과 출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기획서와 완역 원고 내용이 달라서라고 한다. 선인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게 지급한 비용, 담당자가 소비한 직간접 및 시간 상 기회비용 등을 고려하면 정말 예기치 못한 결론이다. 게다가 번역자로서 말하건대 이 책은 마케팅 전문가가 말하는 스마트폰의 사회적 영향력을 여러 각도에서 흥미롭게 다룬 양서다. 기획 당시 생각했던 것보다 내용이 너무 깊었는지 아니면 너무 얕았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한계이익조차 건지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으니 출간을 접었을텐데, 번역료는 받았으니 금전적으로야 아쉬울 것 없고 그저, 죽어서 이젠 없지만 출판사 컴퓨터 안에서는 살아가는 한국어 번역본의 첫 독자로서 아쉬울 뿐이다.
그리하여 내 '인생의 무게 下' (내 경우에는 기납품 미출간이며 향후 출간 전망도 굉장히 낮다고 판단하는 원고) 목록은 <Modernist Cuisine (중 극히 일부)>, <Smart Growth>, <Txt Me> 등 셋으로 늘었다. 그 중에도 <Txt Me>는 실종(사망 추정)이 아닌 사망 확정으로서 최초 타이틀을 가져갔다. 최초의 계약, 최초의 단독 계약, 최초의 지명 계약, 최초의 인세 제안... 그리고 최초의 출간 불발 확정까지. 최초는 계속된다. 어떤 최초일지 예상하지 못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