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브스코리아 2015. 11월] 순혈과 순익 (Bloodlines and Bottom Lines), 2015.10.23
이 건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1. 수주 경위
10.13 09:00 <Simple Rules> 샘플 제출 마감기한이었으며, 당연히 그 전날 밤에 전송 완료했다.
10.13 11:02, 바른번역에서 온 전화(였으나 샘플 마감기한 이후 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역시나 샘플 관련은 아니었고, 포브스코리아에서 급하게 (기한이 3일 후인 16일 정오까지였다) 10페이지 짜리 기사 번역을 의뢰했는데 가능한지 문의 내용이었다. 일단 기사를 보내주면 바로 확인하고 가능여부를 알려주겠다고 했는데, 원고를 받아 분량을 보니 아니 내가 전업번역가도 아니고 안되겠다 싶어 메일 받은 지 20분 만에 안되겠다 죄송하다 답을 보냈다.
10.13 14:00 바른번역에서 오늘만 두 번째 온 전화. <Simple Rules> 번역가로 선정되었다는 전화였다. 출판사는 과연 내 샘플을 읽어보기는 한 것인가 의심이 드는 동시에, 제대로 안 읽어보고 선정했다면 안 읽어봐 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바른번역 이지은 팀장님은 출판사에서 12월 말까지 제출 원했으나 협상하여 1월 4일까지로 연기했다고 했다. 그 정도라면 마감날짜 늦춰지는 데 싫어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 때는 그렇게 끔찍한 결과가 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10.13 16:09 바른번역에서 메일이 옴. 포브스코리아 혹시 마감기한을 일요일 정오까지 하면 어떻겠냐는 내용. <Simple Rules> 마감기한이 연장된 것은 복선이었나 하는 즐거운 배신감이 들었으나 (물론 기분 나쁠 이유는 전혀 없다. 바른번역의 얇은 인력풀(풍부한 인력을 더 풍부한 일감이 압도하는)에게 감사하자) 마침 토요일이 첫째 어린이집 운동회 날이다. (이것이 내가 말한 가족행사의 정체다) 사양할 명분도 이유도 없는 듯 하여 '일요일 밤까지 하면 안 될지', 그리고 '안 된다고 하면 그냥 일요일 정오까지 하겠다'고 답장했다. 밤 새지 뭐.
10.13 16:13 바른번역에서 답장. 월요일 9시까지로 마감기한을 연장했다고 하심.
이렇게 다른 번역건까지 볼모로 잡힌 다사다난한 수주 경과를 거쳤다.
2. 원어 병기
아시아 부자 가문 얘기다 보니 중국 인명이 많이 나온다. 문제는 병기명을 어떻게 할 것이냐인데, 예를 들어 李嘉誠을 이가성(한국 독음)이라 하느냐 리자청(보통화 발음 음역)이라 하느냐 리카싱(출신 지방 병음이 기초라고 추정되는 영어 표기명 재음역)이라 하느냐 문제다.
출판사에 옵션 중 하나로 제시하기는 했으나 한국 독음은 애초에 답이 아닐 듯 했고, 보통화 발음은 발음 근거 찾기가 편하기는 하나(시험 통과용으로 공부하여 합격한 HSK 6급은 이 부분에서 이미 시간과 노력과 돈 값을 했다) 내 이름을 웨이다셴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영어 표기명 재음역은 광동화 등에 무지한 내 한계상 내 이름이 위대선인지 위다이선인지 위대순인지 위다이순인지 헷갈리기도 하려니와 한국인에게 어색할 듯 했다. (郭芳楓을 보통화대로 궈팡펑이라 읽는 편이 그래도 퀙홍픙(Kwek Hong Png)이라고 읽는 편보다는 덜 어색하지 않겠는가)
출판사에서는 단박에 보통화대로 해달라고 답이 왔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래서 일이 쉬워지지 않은 것이, 원문 인명은 출신지역 영어 표기명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홍콩/싱가포르에서 흔히 그렇듯 중국 인명이 아니라 '레이먼드', '에반' 같은 영어이름만 나온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보통화대로 하겠다고 한 이상 오기가 생긴 나는 모든 중국인명의 원어명(중국어)을 병기하기로 했다. 두 가지만 말한다면, (1) 원 중국인명을 찾기에는 구글보다 바이두가 좋았다. (2) 번역에 들인 총 시간 중 아마 반은 이 중국어명 찾는 데 소요되었을 것이다. Kwek Eik Sheng이 郭益升라는 사실은 원고 제출 9시간(수면/출근 시간 등 제외하면 사실상 마감시간)에서야 알아냈다. 곽익승 XXX...
그리고 이 전설이 슬픈 이유는 바로... 출간된 결과물에는 원어병기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데 있다. 특히 영어이름만 있는 사람은 그냥 영어이름만 표기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으니 됐어는 무슨 최선은 언제나 다하는 거고 과다노력을 했다는 게 결국 시간을 아끼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단 얘기다.
3. 제목
line으로 라임을 맞춘 것이 확연이 보이는데 '혈통과 이익' 따위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유의어대사전으로 2단계인가 3단계까지 들어가서야 두운을 찾아냈지만 이 정도로도 부족하지 않나 하던 차에 (1) 안기순 선생님은 '제목은 출판사가 정하는 거니까 안 해도 된다' (왜곡된 기억이라면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러나 왜곡되었다면 바로 왜곡되었기 때문에 제게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2) 그러니까 출판사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거야 하는 마음으로 그냥 넘겼다. 그리고 출판사는 이걸 그대로 썼다. 내가 제출한 안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서였다고 믿겠다.
4. 번역자명
잡지의 특성을 몰랐던 나는 기사에서 역자명을 찾았지만 없었다. 내 이름은 잡지 서지 부분에 다른 번역가 두 명 이름 뒤에 마지막으로 붙어 있다. 글자 크기는 한 5포인트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종합하면 모든 번역 건이 그렇듯 내용으로도 피와 살이 되고 금전적으로도 당연히 보탬이 되며 얘기거리로마저 한 획을 그은 즐거운 작업이었다.